강지연의 그림읽기

어떤 화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자화상만큼 좋은 자료도 없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안다면 그림도 좀 더 잘 보이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 흥신소 탐정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조사할 필요는 없지만 화가들이 그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 화가의 성향이나 성격, 시대적 배경 등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끔 자화상을 보고 그 화가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잘 몰랐던 화가인데도 자화상을 보면 친근감이 느껴지고, 다른 곳에 가서 그 사람 자화상이 또 있으면 ‘어라 이 사람 여기 또 있네’ 하면서 왠지 반갑기까지 하다.

1.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자화상>(Self-Portrait), 1493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독일의 유명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자화상을 여러 점 남겼다. 그중 뒤러가 가장 처음 그린 자화상을 살펴보면 그의 매력을 요모조모 찾을 수 있다.

그림 속 뒤러는 곱상하게 생긴 외모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손에는 엉겅퀴 풀을 들고 있는데 이 풀은 ‘남자의 정절’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니 젊고 잘생기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돈도 많은 이 남자가 왜 엉겅퀴 풀을 든 자신을 그렸을까. 바로 이 그림은 자신의 약혼녀에게 선물할 그림이기 때문이란다. 당시 만 21세이던 뒤러. 젊은 나이에 여행을 떠났는데 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네 약혼녀가 정해졌다.”

뉘 집 처자인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행간 사이에 약혼이 정해졌다니 뒤러가 그 소식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그림 윗부분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뒤러 머리 위에 1493이란 숫자와 글귀가 있다.

그 글귀는 ‘나의 일은 위에서 정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돼 있다. 위에서 정한다는 게 하느님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엉겅퀴는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집에서 정해준 대로 결혼을 해야 하는 뒤러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 뒤러는 그 약혼녀와 결혼을 했고, 이 초상화는 그녀에게 선물로 간 것으로 보아 뒤러가 그녀를 싫어한 것은 아닌가보다. 오히려 엉겅퀴를 들고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그녀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는 기사의 분위기다(실제로 뒤러는 중세 기사 복장을 즐겨하고 자화상을 그렸다).

2.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Self-Portrait), 149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5년 뒤인 1498년에 그려졌다. 결혼하고 유부남이 되더니 수염도 제법 멋지게 길렀다. 뒤러 아저씨는 이제 미청년에서 미중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그의 병은 여전한 것 같다.

완벽한 중세 기사 복장에 장갑도 끼고 맞잡은 손은 그의 변함없이 충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왠지 컬링한 것 같은 고운 머릿결과 꼭 다문 붉은 입술 등 아무튼 실제로 저렇게 생겼던 건지 좀 미화해서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뒤러가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번에도 창문 밑에 글귀를 남겨놨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난 내 외모 그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나는 26살이다.’

창문 밑에 새겨진 글귀 밑에 있는 문양은 AD,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의 약자를 의미한다. 뒤러는 자신의 이니셜을 모노그램으로 작품에 남기고 자신의 모노그램을 다른 사람이 도용하지 못하도록 이례적으로 법원에 저작권 보호 신청을 했던 화가였다. (똑똑하기까지) 그만큼 그가 당대 인기 있는 화가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작품들에는 이 AD 표시가 나타나니 나중에 뒤러의 그림을 볼 때마다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화상을 보면 그 화가가 보인다
3.렘브란트(Rembrandt), <자화상>(Self-Portrait), 1628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밝은 배경 속 빛과 그림자가 분명한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그림 속 20대 초반의 청년 렘브란트의 모습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청년 렘브란트는 이 시기에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다듬어나가고 있었을까.

렘브란트는 경제적으로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성장했다. 렘브란트는 실제로 총명했고 머리가 좋았다. 그는 14세에 대학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14세에 대학에 갔다는 건 렘브란트가 천재이여서가 아니라 그 당시 네덜란드에는 중·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7년을 공부하고 졸업하면 바로 취직하거나 대학에 가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에 어린 청소년들을 빨리 사회로 내보내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림에 큰 흥미를 느끼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의 부모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당시 최고의 화가의 화실에 들여보내주고 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보내 그림 공부도 시켜준다. 18세에 렘브란트는 그림 공부를 마치고 자신감에 가득 찬 채로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와 함께 공방을 차렸다. 이 자화상은 독립 후 몇 년 뒤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 그의 모습은 패기가 넘치는 20대 렘브란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는 앞으로 위대한 화가가 될 자신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렘브란트는 30대 중반에 가장 성공한 화가로 등극한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뒤 큰 명성을 떨쳤던 렘브란트. 그래서 30대에 그린 그의 자화상들을 보면 여유 있고 성공한 그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말년 모습은 어땠을까.
자화상을 보면 그 화가가 보인다
4.렘브란트,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postle Paul), 1661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또 하나의 렘브란트 자화상이 눈길을 붙들었다. 렘브란트가 노년에 그렸던 자화상,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 렘브란트는 분장을 하고 있다. 바로 성서 속 인물인 사도 바울인데, 당시의 화가들 사이에서는 성서 속 인물로 분장한 후 그림을 그리는 것이 15세기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제 젊은 날의 모습은 없고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 남았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눈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늙고 힘없는 노인의 눈이 아니다. 아직도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빛나는 눈이다. 렘브란트는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그림은 그에게 있어 삶의 가장 큰 목적이었음이 틀림없다. 그의 눈은 매우 명민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듯한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노년의 렘브란트는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고 크게 상심했으며, 작업 속도가 느린 탓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재산 압류를 당하기도 했다. 자식들도 일찍 죽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저런 모습으로 늙어갈 수 있던 렘브란트. 그의 노년의 모습을 보며 렘브란트가 왜 위대한 빛의 화가로 칭송받는지 깨닫는다. 그의 머리 위 터번에 드리워진 멋진 빛처럼, 그는 빛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줄 아는 위대한 화가였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화가라는 것을 말이다.

강지연

교사.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