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일러스트·추덕영
조선 시대부터 글을 숭상해온 전통이 길었던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도 작가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다.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명예의 측면이 강하다. 비록 경제 형편은 변변치 못하다 할지라도 어디서든 작가라고 하면 학자 못지않은 대우를 받거나 최소한 ‘인격적인 신분 보장’은 확보된다.

베스트셀러를 내는 작가라면 유명인이니까 당연하다 하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책의 판매와 무관한 이른바 ‘문학성’을 추구하는 작가도 (때로는 베스트셀러 작가 이상으로) 대중의 존경과 선망 어린 시선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우리 문단에서는 오히려 상업적인 작가와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어느 사회에나 문학성을 앞세우는 작가와 상업성을 무기로 하는 작가가 있게 마련이고, 이들 간에 자연스러운 분업이 이루어져 전반적인 문단 혹은 문학 시장을 이끌어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문학에 관한 지나친 엄숙주의가 팽배한 우리 문단에서는 유능한 이야기꾼이 작가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문단보다 훨씬 솔직한 것은 음악계다. 적어도 조수미와 이효리를 동류로 여길 음악 팬은 없을 테고, 이 두 여자 ‘가수’의 음반을 함께 구입하는 팬도 드물 테니까. 그러나 음악계는 음악계 나름대로, 어쩌면 문단보다 더욱 높고 튼튼한 장벽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구분이다.

대중 가수인 인순이가 예술의전당에 공연을 신청했다가 거부된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에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바람직한 음악적 분업을 이루기는커녕 아예 서로 무관심 속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 ‘원수 같은 이웃’처럼 보인다.

다만 그 양태는 문학과 정반대다. 문학 분야에서는 작가들이 그런 구분을 조장하고 소비자들이 그렇지 않은 반면에, 음악 분야에서는 반대로 작가들 이전에 소비자들이 처음부터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명확한 사실은 지금의 그런 구분이 장차 미래에는 무의미해지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년 뒤의 음악학도라면 음악사 과목에서 바흐와 모차르트만이 아니라 비틀스와 록, 블루스, 재즈도 공부할 게 분명하다.

설마 그러겠냐고. 상업성과 무관한 고전음악과 상업성을 표방한 대중음악이 어떻게 같겠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상업성과 무관한 ‘순수’ 음악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역사의 시계추를 바흐와 모차르트가 살았던 200~300년 전으로 돌려보면 알 수 있다.

근대 음악을 낳은 17~18세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지금과 같은 단일 국가가 아니었다. 바흐의 고향인 작센(Sachsen)은 독일 지역에 수백 개나 존재했던 영방국가(일종의 도시국가) 중 하나였고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Salzburg)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다.

영방국가들은 봉건적 서열로 제국의 휘하에 있었으나 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신성로마제국도 역시 명칭만 제국일 뿐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식 제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못 됐다. 오죽하면 후대의 어느 역사가는 신성로마제국을 가리켜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심지어 ‘제국’도 아니라고 말했을까.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력은 사실상 오스트리아와 남독일의 직할령에만 국한됐다. 이렇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수많은 소국이 존재하는 역사적·정치적 지형은 근대 음악을 태동시킨 중요한 배경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사주는’ 팬이 없으면 창작 활동은 물론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방송 매체나 오디오 장비가 없었던 시절의 음악팬은 다름 아닌 왕과 귀족들이었다. 따라서 음악가들에게는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왕국보다는 고만고만한 영방국가의 군주들이 득시글거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을 ‘음악 시장’으로 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군주들은 문화를 후원하는 의미에서 음악가들을 지원했지만(예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 현실적으로도 음악이 필요했다. 국가라면 의전과 행사가 중요한 법이다. 궁전을 새로 지었을 때, 교회나 대학을 건립했을 때,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자식을 얻거나 생일을 맞았을 때, 그에 맞는 축하 행사가 열렸고 음악이 필요했다. 지금 같으면 음반을 틀면 간단히 해결되지만 당시에는 악단을 불러야 했다. 어차피 생음악이니 새 음악이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작곡가도 필요했다.

힘센 군주들은 궁정 내에 상설 악단을 두고 저명한 음악가를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악장)로 고용해 악단의 지휘와 작곡을 맡겼다. 바흐, 헨델, 하이든이 다 독일 영방국가들의 카펠마이스터 출신이다. 이런 관습이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를 먹여 살렸고 후대에 길이 남는 고전음악을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음악이 상업성과 무관한 ‘순수’ 음악이라는 견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매체를 이용한 상업성이 아니었을 뿐 과거 고전음악의 음악가들도 의뢰인의 주문을 받아 ‘상업적인 목적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

이와 같은 예술의 태생적인 상업성은 미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처럼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품 시장이 없었던 시절(화랑이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음악가들처럼 주문을 받아서 작품을 제작했다. 수십 명이 합주하는 경우가 많은 음악과 달리 미술은 개인 작업의 성격이 강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미술도 과거에는 순전한 개인의 창작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명 만화가들이 주인공의 얼굴만 그리고 주변 인물이나 배경은 제자들에게 맡기듯이, 르네상스와 근대의 화가와 조각가도 작품 전체를 직접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세 길드(guild) 작업처럼 스튜디오의 주인(master)은 의뢰인과 계약을 맺고, 작품의 전체 지휘와 주요 부분만 자신이 담당하고 나머지는 도제들에게 맡겼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는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어느 것이 그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를 놓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무성하다(그는 다른 화가의 작품도 많이 거래를 알선했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화랑의 원조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화가의 스튜디오는 오늘날의 스튜디오와 달리 공방과 비슷했다. 어떤 미술 평론가는 지금의 CNN이나 할리우드와 비교하는데, 미술품이라는 시각 매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과거의 그런 예술적 관행을 오늘날 ‘순수’ 예술의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 당시에는 화랑도 없었고, 미술대학 교수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귀족이나 재력가를 제외한 일반인 미술 애호가가 전무했던 시대다. 오로지 주문을 받아 작품을 ‘납품’하는 것이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예술을 생산하는 ‘공장’에 더 가깝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처럼 가장 큰 의뢰인, 즉 당시 유럽 최대의 부호였던 로마 교황의 주문을 받으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고, 벨라스케스처럼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부로 풍요를 누렸던 에스파냐 왕실의 궁정화가로 취직해도 생계에는 걱정이 없었다. 교회가 건립되면 제단화와 장식 조각상을 많이 의뢰받을 수 있었고, 공주가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면 궁정화가는 그 초상화를 그렸다.

고전 예술은 처음부터 상업적이었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의 소비자가 사회적 상류층에 국한됐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됐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술 환경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상업성과 대중성에 적합하다.

따라서 지금 누가 문학, 음악, 미술의 순수성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면 그 의도는 충분히 수상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표방하는 순수성은 곧 다른 의미의 상업성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순수를 앞세우지만 그 뒤에 불순이 있다면 이미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순수하지 못한 셈이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