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의 그림이 좋다. 그의 푸른색 점박이 그림이 좋고, 그의 예술가적 삶도 좋다. 세상엔 화가가 많다.

피카소나 마티스 같이 살아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쥔 대가가 있는가 하면, 살아서 단 한 점도 못 팔거나, 혹은 하나밖에 팔지 못한 불행한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이도 있다.

서민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낸 박수근은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 갔고,이중섭은 부두에서 막일을 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재료비가 없으면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꿈과 희망을 그리기도 하였다.

수화는 어려서 유복한 부모 아래 동경 유학도 다녀오고, 성장하여서는 한국전쟁 후 어려운 시절에도 파리에 갈 만큼 호사를 누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초창기부터 줄곧 수화의 작품 소재가 된 달과 조선백자항아리, 여인과 꽃, 산과 하늘 그림은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가슴 속에 따뜻하게 다가오는 사실적 그림도 좋지만, 나는 그의 뉴욕시절 별처럼 빛나고 이성처럼 냉철한 점점(點點) 추상화가 좋다.

그가 즐겨 쓴 푸른색은 조선청화백자의 푸른빛 같기도 하고,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별 빛 같기도 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수화는 무수한 점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그려내었다. 그것은 “...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이었다. 푸른색 점은 마치 이슬람 사원의 푸른색 타일이 점점이 박힌 것같이 신비롭고 이채롭다.

수화에게 뉴욕은 ‘무미건조한 고층건물의 도시’였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깊어질수록 화폭위에 푸른 점은 짙어만 갔다. 점은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겹쳐지고 쌓여서 십 수만 개의 점이 되고, 또 다시 점과 색이 모이고, 색과 점이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흩어지기를 수만 번, 뉴욕에서의 10년은 환기만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완성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점은 깊고 푸른 하늘의 별이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예술가의 길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중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니시기시로(錦城) 중학을 나왔다.

1936년 니혼(日本)대학 예술학원 미술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4년 5월, 요절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1910 ~1937)의 부인이였던 김향안(金鄕岸·본명 변동림,1916~2004)과 결혼하였다. 훗날 김향안은 수화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환기와 김향안은 하나였다.

수화는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향토색 짙은 고향의 산과 마을, 달과 항아리, 나목(裸木) 꽃과 여인 등 한국적 정서를 화폭에 담았고, 프랑스 시절에도 줄곧 한국적 정서를 놓지 않았다.

1959년 귀국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이 되어 후학을 가르치며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1963년 10월,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작가로 선정되어 그의 예술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 계획은 비엔날레 참가 후 귀국길에 뉴욕을 거쳐 오기로 하였으나, 비엔날레에 걸린 자기의 그림을 남들과 비교해 보고 “...단지 나는 시골(한국)에 살았다”고 탄식하고 작품세계의 진부함과 한국의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뉴욕이라는 큰 세상으로 나가기를 결심한다.

수화의 뉴욕행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타인에서 자아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더불어’에서 ‘외로이’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뉴욕이라는 낮선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외롭고 힘든 예술가의 길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뉴욕일기

뉴욕은 거대한 회색도시다. 바쁘고 분주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삭막하다. 수화는 뉴욕 생활을 “...오후 3시 30분. 오늘은 어두워서 일이 안 돼요. 눈 뒤에 비가 오나봐.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조국이라는 게, 고향이라는 게, 내 예술과 우리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애... 내 그림 좋아요. 이제까지의 것은 하나도 안 좋아. 이제부터의 그림이 좋아. 저 정리된 단순한 구도,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 일거야.....(1963년 12월 12일)”라고 적고 있다.

뉴욕에 온 지 두 달도 못 된 시점의 일기인데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절절하다. 수화가 이처럼 그리는 고국을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뉴욕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는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었다.

만일 당시 수화가 다시는 못 보는 고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때의 심경이 어떠하였을까. 수화는 사랑하는 조국의 하늘과 별, 산과 나무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고통스럽게,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슬프게, 하지만 줄기차게 점을 찍고, 그리고 또 그렸다.

“아침부터 백설(白雪)이 분분(粉粉).....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點畵)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1965년 1월 2일)”
“점점(點點) 주제로 100호 시작하다. 종일 눈보라가 날린다. (1969년 2월 26일)“
“마산에서, 편지의 구절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 섬에 보리가 누렇다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 (1970년 6월 23일)”
그의 뉴욕일기다.

자신의 발견

수화는 고집스럽게 자기 색을 주장하였다. 1967년 10월 13일자 일기에는 “봄내 (뉴욕타임스)신문지에 그리던 일 중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 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으로 가득 차다”라고 하여, 뉴욕 온 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무렵 비참하게 무너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때, 아무도 도와줄 수 없기에 수화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새로운 의지를 불태운다. 뉴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 진다”고 고뇌하던 수화에게는 진정한 시련의 첫 걸음이었다.

수화의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은 1970년 새해가 되자 절정에 다다른다. “외로운 것을 견디어야 하나보다. 내 예술만을 생각하기로 하자.”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도 삶의 고단함과 작업의 외로움은 금방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해 1월 12일 일기에는 “고생하며 예술을 지속한다는 것은 예술로 살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생이 무서워 예술을 정지하고, 살기 위해 딴 일을 하다가 다시 예술로 정진이 될 것일까” 라고 썼다.

수화로서는 물감 살 돈도 걱정이 되는 듯, 살기 위해 다른 일을 생각해야 할 만큼, 사뭇 비장함마저 든다. 뉴욕생활이 만 7년째니 삶이 팍팍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별 빛 같은 추상
7.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캔버스에 유채, 236x172cm, 개인소장
7.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캔버스에 유채, 236x172cm, 개인소장
, 1970년, 캔버스에 유채, 236x172cm, 개인소장">그런 가운데 서울 한국일보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이를 계기로 수화의 추상세계가 국내화단에 큰 파장을 몰고 온다.

대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색의 점들이 빼곡하게 박혀 밤하늘에 빛나는 별 빛 같은 추상을 그린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과 화가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는 “시(詩)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라고 하여 시와 화의 경계를 허물었는데, 수화는 서울 성북동 시절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로 잘 알려진 시인 김광섭과 가까이 지낸 인연이 있다.

1969년에 발표된 이 시는 간단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삶의 깊이와 정신의 넓이가 배어난다. 수화는 외로운 뉴욕에서의 작업을 밤하늘 뭇별을 헤는 마음으로 점을 찍었다. 그 점은 빛이 되었다.

영원속의 별

1974년 정월 들어 수화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2년 전부터 전에 없이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늘 무겁기만 하더니, “벌서 며칠인가 머리가 무겁기만 하다.

몸이 무겁기만 하다. 견디어 살아가겠는데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고 술회한다. 73년 5월 18일, 단 한 개 남은 앞니 한 개를 뽑고, 7월 19일에는 아랫니 두 개 남은 것 마저 뽑아 몹시 고통스러웠다는데, 수화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왜 그렇게 건강이 안 좋아졌을까.

추측컨대, 무리한 작업과 유화물감 희석제로 쓰이는 향긋한 송진 같은 냄새가 나는 터펜타인(Turpentine)이 원인인 듯하다. 이 기름은 냄새는 그다지 나쁘지 않지만 몸에는 치명적인 독성이 있어 환기를 잘 해야 되는데, 수화의 아틀리에 작업환경이 그리 좋지 않다면 몸에 독성이 쌓일 여지가 충분했으리라.
8.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한 환기미술관 전경. 1992년 설립되었다. 최선호ⓒ
8.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한 환기미술관 전경. 1992년 설립되었다. 최선호ⓒ
수화의 점화(點畵)는 캔버스를 반드시 누이고 작업해야 물감이 흐르지 않고 부드럽게 스며드는데, 그렇게 작업하다 보면 독한 기름 냄새를 고스란히 들이마시게 된다.

수화가 그린 대부분의 대작을 허리를 구부리고 몇 시간 씩 혹은 몇 일 씩 계속 작업해야 하다 보면 허리에 무리를 주어 좋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의 뉴욕작업사진은 허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로 작업하고 있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974년 7월, “죽을 날을 걱정하던” 수화는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고, 디스크 수술을 기다리면서 생의 마지막이 된 7월 11일, 일기에는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지금 나는 아무런 겁도 안 난다. 평안한 마음이다”라고 적었다.

해가 환히 든 다음날 수술을 받고 회복 중 침대에서 떨어져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12일 동안 인공호흡으로 연명하다가, 1974년 7월 25일 오전 9시 40분 영원속의 별이 되었다.

수화가 평소 “나는 뭐 죽어서 묻히는 것은 아무데 묻혀도 괜찮아...” 했던 그 말을 좇아, 그가 즐기던 산 언덕 “아, 이런데 누워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뉴욕 허드슨 강변 북쪽 뉴저지 주의 산마루에 묻혔다.

살아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국의 하늘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글·사진 최선호(화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