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 GI JUN


첫 번째로 뽑힌 키워드 ‘슬럼프’에 농도 약한 불평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작정하고 풀어놓는 이야기다.
“1994년 SBS 공채 4기로 데뷔한 이후 매 순간 슬럼프에 빠진 것 같아요. 드라마나 영화 등 일이 많아도 슬럼프, 일이 없어도 슬럼프를 겪었죠. 제 스스로에게 이 일이 정말 맞는지 되묻기를 수백 번도 넘게 한 것 같네요.
기계적으로 닥친 현실에만 급급하며 대사를 주고받고, 집에 오면 쉬고를 반복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봤어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나 하고 말이죠. 그럴 때면 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요. ‘나 자신만의 슬럼프 탈출법’은 바로 ‘여행’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일탈해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즐기죠.”

SBS 공채 4기 중에서 김남주 씨랑 저는 모든 간판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였죠. 그러던 차에 군대를 가게 됐고, 제대 후에도 곧바로 드라마 주인공에 캐스팅 됐어요.
하지만 그 드라마가 조기 종영하게 된 후 첫 좌절을 맛보게 됐죠.”
그렇게 한동안 연기에 손을 놔 버리면서 ‘감’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럴수록 천착하게 되는 것은 ‘연기가 과연 내 길일까’하는 고민이었다.
“그 때 서울예술전문학교 재학 시절 한 교수님이 전해주신 시인이자 극작가인 故 유치진 선생님께서 남기셨단 말씀이 떠올랐어요.
‘너희들이 10년 동안 노력하지 않고는 그 길이 너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려라.’ 그래서 다시 연기와 함께 하기로 했죠. 10년은 노력해 본 후에 결정하기로요.
1994년 데뷔했지만, 군대를 다녀왔으니 실제로 연기와 함께 한 것은 2006년이 10년이 되는 ‘마지노선’이었어요. 그런데 2005년 말 ‘주몽’에 출연하게 되면서 배우인생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참 신기하게도 ‘주몽’ 출연 후 ‘연기 대상 신인상’을 받았어요. 데뷔 10년이 지난 배우가 받은 신인상, 아이러니컬하지 않나요? 하지만 저는 의미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지금까지가 준비하는 10년이었다면, 앞으로는 도약하는 10년이 될 것이니까요.”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한 그의 ‘무작정’ 여행 가운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고 1 여름에 떠났던 시골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어느 노부부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다음 날 아침 머슴밥 같이 수북하게 퍼주신 밥을 맛있게 먹고 일어서는데, ‘밥 값 해야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밭일을 했어요. 3일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할머니께서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돈 3만 원을 꺼내 손에 쥐어주시더군요. 집에 돌아가 다리미로 잘 펴서 앨범에 넣어뒀는데 지금까지도 앨범 속에 그대로 있어요.
요즘 누가 재워달라고 서슴없이 문을 열어 주겠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갑게 받아주시던 노부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돈과 명예야말로 남이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직함이나 지휘도 상관없어요.
내 스스로가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인간 원기준으로서 자연스럽게 제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훗날 평가하겠죠. 하지만 그 순간, ‘진심이 우러러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2006년 12월 21일 결혼했으니까, 햇수로 이제 4년이네요. 아내와 처음 만난 건 정말 예고된 건 아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땐 다른 사람과 엮어주려고까지 했었거든요(웃음).
두 번째 만나던 날도 당시 제게 골프를 가르쳐 주던 캐나다 골프 선수와 셋이서 연극을 보러 갔어요. 연극을 보던 중에 무심코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아내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고요. 갑자기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예요.
내 여자라는 느낌, 정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사랑’은 믿음을 밑바탕에 두고 있을 때 가능한 것 같아요.
아내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당연한 생각인 것 같아요. 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 줄 수 있어요.
생각을 하다 보니, 저는 정말 복 받은 사람 같아요. 주변에 조력자들이 많고, 항상 사랑 받아 왔거든요.”


연극은 전반적으로 찰리의 눈을 통해 자폐증을 보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자폐증 환자에 대한 지식 없이 형을 바라보게 되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른 사람’이 바로 형 레이먼드에요. 형과 함께 하면서 그와의 교감을 통해 따뜻한 형제애를 느끼게 되죠.”
총 1시간 40분 중에서 1시간 37분이나 등장하는 찰리는 쉴 새 없이 말을 해야 하고,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레인맨’은 마치 로드무비 같은 연극. 시니컬하면서 다혈질인 성격의 찰리는 배우에게 적지 않는 고민을 안겨줬다.
“바보 같은 실수를 했더라고요. 나는 이미 찰리인데, 저보다 찰리를 더 잘 보여줄 사람은 없는데, 왜 내가 찰리가 되고자 고민을 했을까 싶었죠. 이후로는 그저 편하게 내 안의 찰리를 끄집어내어 보여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 안의 찰리가 반응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사실은 아직도 어려워요. 제 롤 모델인 ‘남경주’ 선배와 같은 역으로 더블 캐스팅 된 것이라 잘해야 되겠다는 부담감도 있고요. 예술의전당에서 2월 19일부터 3월 28일까지 50회 공연이 시작돼요.
원기준의 ‘찰리’, 꼭 보러 오세요. ‘형 레이먼드와 놀고, 연인 수잔나와 놀고, 그 안에서 관객과도 함께 노는’ 여유 있고 공감 있는 무대가 될 거에요.”
나이 든다는 것 “솔직히 나이 먹는 걸 못 느끼겠어요(웃음). 1974년 2월 태어났으니 서른일곱 살이 됐네요. 10년 전만 해도 열정적으로 일을 즐기긴 했지만 솔직히 그땐 연기보단 외모에 더 신경을 썼어요.
‘무슨 옷을 입을까. 표정은 어떻게 할까. 제스처는 어떻게 할까’ 등 외적인 것에 집중할 땐 모니터를 통해 보는 제 모습은 어딘가 부족해 보이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공연이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감정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제 감정의 흐름에 대한 상대방의 감정에 대응하는 법을 알게 됐죠.” 하지만 서른일곱의 원기준은 ‘연기에 발전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중년배우가 됐을 때 ‘멋있는 배우’로 불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주름이야말로 얼굴 표정에 따라 얼굴에 골이 생기는 거잖아요. 어떤 표정을 짓는가에 따라 다른 주름이 생기게 될테니, 제가 항상 행복하고 즐거우면 얼굴 주름도 그렇게 생기게 되겠지요.”
‘배우 원기준’. 도약의 10년이 흐른 후 다시 이 의자에 앉아 있을 그는 왠지 농도 짙은 중후함으로 주름마저도 빛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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