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fondu)와 라클레트(racleette)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겨울은 내게 고마운 계절이다. 주로 에멘탈, 그뤼예르, 아펜젤러를 녹여 먹고 있지만, 구할 수 있다면 가장 원하는 치즈는 콤테. 콤테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치즈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와인을 좋아하는 처지에서 콤테의 미덕은 뱅 죤(vin jaune)이라는 독특한 와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둘 다 프랑스 동쪽, 스위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프랑스 쥐라 지방의 특산품이자 프랑스의 자랑거리다.보르도, 부르고뉴, 샹파뉴 등 쟁쟁한 이름들 때문에 프랑스 와인 산지를 말할 때 쥐라가 호명되는 순서는 늘 뒤처진다. 하나 쥐라는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와인을 여럿 낳은 곳으로, 한번 그 매력에 빠지면 먼저 그 이름을 말하게 되는 곳이다.쥐라의 중심지는 아르브와(Arbois)로 루이 파스퇴르가 여기서 났다. 아르브와, 레투왈(L’Etoile), 샤토 샬롱, 코트 뒤 쥐라는 이 지방의 대표적인 원산지 통제 명칭들(AOC)이다. 이 곳에서는 샤르도네(백), 사바냉(백), 풀사르(적), 피노 느와르(적), 트르소(적)를 가지고 적절히 섞거나 혹은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든다. 하지만 쥐라의 레드나 로제 와인은 그다지 경쟁력이 있지는 않다.쥐라를 말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들은 뱅 죤과 뱅 드 파이으(vin de paille)로, 이 둘은 모두 화이트다. 후자는 이탈리아의 레치오토(recioto)나 아마로네(amarone)처럼 포도를 말려 당도가 높아진 즙으로 와인을 만든다. 포도를 밀짚 위에서 말렸다고 해서 밀짚 와인으로 불린다. 빛깔로 보자면 언뜻 이 둘은 비슷하지만 맛은 극명하게 대치된다. 뱅 죤은 지극히 드라이하고, 밀짚 와인은 매우 달콤하다.이 중 뱅 죤은 세계 그 어느 와인 산지에서도 흉내 내 만들 수 없는 귀한 와인이다. 우리말로 옮겨 적으면 노란 와인이 되는데, 샛노란 호박빛의 와인 빛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리라. 그러니 ‘쥬라의 황금(l’or du Jura)’이란 별명은 당연하다. 이 와인은 오직 사바냉(savagnin)이라는 품종만을 가지고 만든다. 사바냉은 트라미네의 변종으로 알자스의 대표적인 품종 게브르츠트라미네르와 계보를 공유한다.뱅 죤은 평균 수명이 50년을 넘고, 와인에 따라서는 200년을 버티기도 한다. 화이트 와인이지만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온도는 16도로 웬만한 레드 와인 음용 온도에 가깝다. 온도를 맞춰 놨으니 이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졸라봐야 녀석은 못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빈티지라면 마시기 6시간 전부터 미리 열어두었냐부터 물을 것이고, 좀 오래된 뱅 죤은 단단히 뭉쳐있는 맛과 향의 근육을 풀기에 24시간도 모자를 수 있다는 대답을 천천히 들려줄 것이다.녀석이 이렇게 까다롭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녀석은 최소 6년 3개월 동안 오크통에서 칩거하며 자신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강하다. 주인이 자신을 보러오기 위해 내는 발자국 진동도 꺼려할 만큼 숙성 기간 중 그 어떤 외부의 접촉이나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이쯤 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일반적인 양조 상식을 잠깐 기억해 볼 때, 나무결 사이가 온통 공기 통로인 오크통에서 와인은 그 틈으로 자연스레 증발하게 된다. 증발로 인해 와인이 줄어들게 되면 오크통에는 빈 공간이 생기는데 이를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 공기가 머무르게 되면서 와인이 산화되어 결국은 식초로 변해버리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고자 양조장에서는 숙성 기간 중 오크통 안을 와인으로 빈틈없이 채우는 등 끊임없는 손길로 와인과 함께 숙성의 시간을 보낸다.뱅 죤은 이미 시작부터 이 상식적인 제조법을 보기 좋게 무시하며 독자적인 길을 나선다. 1차 발효를 마친 와인을 오크통에 담되 애초부터 꽉 채우지 않는다. 일부러 공간을 남기는 것이다. 쥐라의 마법이 시작되는 것은 이때부터다.특정 박테리아로 인해 와인 표면에는 효모막이 생성된다. 와인이 산화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은 바로 1.5~2.5cm 두께를 가진 이 막이다. 아울러 이 막은 호두, 헤이즐넛이 먼저 떠오르는 농밀한 향과 한번 맛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산미를 뿜어내는 노란 와인을 완성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뱅 죤의 특별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와인을 담은 병모양까지 특이한 모습이다. 보통 와인 1병의 용량이 750ml 인데 반해 뱅 죤은 키 작고 땅딸하게 생긴 클라블랭(clavelin)이라는 병에 담긴다. 이 병의 용량은 620ml로, 1리터의 와인이 숙성 기간 동안 잃어버리고 남은 양이라고 한다.샤토 샬롱은 쥐라를 이루고 있는 마을 이름이자 이 마을에서 만드는 뱅 죤을 가리킨다. 샤토 샬롱이 요구하는 모든 기준에 맞춰 와인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6년 3개월의 숙성을 거친 후 맛보았을 때 그 수준이 높지 않으면 샤토 샬롱이라는 원산지명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 때는 코트 뒤 쥐라 원산지명을 받는 수밖에…. 그러니 같은 뱅 죤이라 하더라도 고품질의 뱅 죤을 알아보는 키워드는 샤토 샬롱임을 기억해 두는 게 좋겠다.매년 2월 첫째 주말 쥐라에서는 ‘노란 와인 술통 깨기’라는 이 지방 최대 규모의 축제를 연다. 올해로 14회째 맞이하는 이 행사는 6년 전 오크통에 담아두었던 뱅 죤을 처음 꺼내 함께 맛을 보고 축하하는 자리다. 오크통에 막대를 대고 이것을 나무망치로 힘껏 내리쳐 술통을 깨는 순간은 이 행사의 클라이막스다. 축제가 열리는 장소는 매년 쥐라의 여러 마을을 바꿔가며 열린다.계속되는 시련과 어려움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는 지인이 있다면 이 와인을 두고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아, 여기서 정말 주의할 점이 있다. 준비하는 뱅 죤은 적어도 세상에 나온 지 10년 이상차여야만 한다. 젊은 노란 와인을 겁 없이 상대했다가는 격려고 나발이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강력한 신맛만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사진 알덴테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