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아 재미한국무용회 회장

손정아 회장은 한국레포츠협회 부총재, 민주평통 문화상임위원 등의 직함보다 ‘황진이’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만큼 황진이에 애착이 가기 때문이다.

귀국 후 10년 동안 그녀가 ‘황진이’ 공연을 이어온 이유다.
춤사위로 되살린 求道者 황진이
손 정아 회장은 1년에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활동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머문다는 강남의 오피스텔을 찾았다. 그리 넓지 않은 오피스텔엔 수많은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동양화와 서양화가 고루 섞인 미술 컬렉션에 관심을 보이자 모두 미국서 가져온 작품이라고 했다. 미국서 갤러리를 운영한 적이 있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인터뷰를 위해 다탁에 앉자 그녀가 차를 내왔다. 좋은 보이차는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가 있다. 그녀는 지금 내온 차는 대만 공연 당시 천수이벤 총리가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귀국한 지 10년이 됐다. 1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귀국 첫 작품으로 황진이를 무대에 올렸다. 귀국 10주년 기념작품도 황진이다. 큰 공연을 5회 정도 했고, 작은 공연은 수없이 했다. 그때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늘 고마운 마음이다.”

오랫동안 황진이에 천착한 작업을 해온 것으로 안다. 황진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시, 서화, 악, 가, 무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예인이다. 황진이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유가 있나?

“황진이 하면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재색이 뛰어난 명기’정도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그녀의 내면적 세계를 좀더 심층적으로 통찰, 분석해 재조명하고자 했다. 구도자로서 황진이의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황진이의 어떤 면에 끌렸나?

“황진이는 여성에 지극히 폐쇄적인 시대환경 속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여인이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시대를 초월해 가장 실존적인 삶을 완수한 절세의 가인이다. 서경덕과의 사랑을 끝으로 사바세계의 온갖 정념이 덧없음과 애증의 무모함을 깨닫고 구도의 길을 나섰다. 그런 면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그녀에게 끌렸다.”

황진이는 어떤 형식의 극인가?

“우리 전통에 기반을 두었다. 전통음악과 퓨전음악의 결합, 연기, 소리, 모던 춤사위 등이 독특하게 한데 어우러진 현대적 감각의 한국적 공연예술의 총체극이다.”
춤사위로 되살린 求道者 황진이

무대에서 연기, 소리, 춤 등 모두를 한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중학교 때부터 국악을 했다. 고등학교 때엔 중요무형문화재 23호인 박귀희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고, 이후에 한영숙 선생님께 승무, 학무, 살풀이를 사사받았다. 중요무형문화재 5호인 박권진 선생께는 판소리를 배웠다. 가끔 선배들이 춤이면 춤, 소리면 소리만 하지 혼자 다하면 우린 뭐 하냐고 장난삼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인 듯하다.”

공연을 하며 아쉬운 점은 없었나. 무대라는 한계 때문에 다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황진이는 불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황진이를 제대로 보여주려면 불교 예술을 많이 가미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게 조금 아쉽다. 종교가 다른 관객들이 불편해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대중성이 약한 전통예술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안타깝게 아직도 비대중적인 전통예술이 대중적 장르로 즐길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황진이를 만들었다. 한국전통 교방무용부터 불교무, 궁중무용과 선비들의 놀이문화, 한국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습득해 나갈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황진이처럼 손 회장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남성 팬들이 많을 듯한데,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공연을 하고 나면 만나자는 남자들이 2열 종대로 줄을 선다(웃음). 그냥 인연을 못 만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독한 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봤다. 절박하게 살아보지 않고 그냥 황진이가 되겠나. 사랑을 모르고선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역할이 황진이다.”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어릴 때 내 사주를 본 스님이 ‘이 아이는 예인이 안 되면 비구니가 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소리와 춤을 배웠고, 중학교 때는 영화를 찍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일본, 미국 등으로 공연을 다니면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장 미국으로 갔다.”
춤사위로 되살린 求道者 황진이

미국에서의 활동은 어땠나? 많은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제가 갔을 때만 해도 미국은 한국무용의 불모지였다. 공연을 하며 한국 어린이무용학교와 Korea music & dance school을 열어 20년 넘게 운영해왔다.”

미동부 문화위원회 회장도 맡았다고 들었다.

“맞다. 미국은 상류사회에 들어가기도 어렵고, 교류를 나누기는 더더구나 어렵다.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르다. 상류사회 지도층과 교류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명박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연할 때 알았다. 지금도 나를 보면 ‘미국 무용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게 문화의 힘이다.”

귀국 후 한국에서 활동하며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인가.

“재미무용가로서 한계가 분명히 있다. 실력이 같거나 월등한데도 동포 예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 받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얘기했듯이 예술인들은 민간교류의 핵심이다. 특히 이중 언어가 가능한 재외 예술인들에게 그런 역할을 준다면 훨씬 많은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번 공연을 마치면 한동안 무대를 떠날 계획이라고 들었다. 황진이가 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난 것과 비슷한데, 어떤 이유인가.

“비슷한 것 같다. 한동안 세속을 떠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생각이다. 공연을 하지 않는 대신 후진을 키우는 데 주력하면서 제2의 황진이를 키우고 싶다.”

글 신규섭·사진 김기남 기자 wawoo@moneyro.com


손정아

재미한국무용회 회장
전 미동부 문화위원회 회장
서울국악예술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고려대학교 ICP 최고위 과정 수료
뉴욕 락클랜드 대학 졸업
서울국악예술 중. 고등학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