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리는 외환위기 때 존폐의 갈림길에 섰던 회사다.10년이 지난 지금 코리안리는 자산 4조 원, 담보력 1조 원의 초우량 회사로 거듭났다. 코리안리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박종원 사장의 등산경영이 있다. 종로 코리안리 빌딩 접견실에서 박 사장을 만났다.년 8월 20일 새벽, 설악산 대청봉에는 초속 30m의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짙은 안개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 간간이 내리는 빗줄기는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 선두에 선 박종원 사장은 “옆의 밧줄을 잡아!”,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바위 뒤쪽으로 돌아~”라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다부진 체격의 박 사장은 연신 뒤쪽의 젊은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한 직원의 안경이 산 아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또 다른 직원은 바람에 밀려 5~6m를 튕겨져 나갔다가 가까스로 로프를 붙잡았다. 산 정상을 향할수록 바람은 거세졌다. 그로부터 30분 뒤, 10m 앞도 보이지 않는 악천후를 뚫고 그들을 대청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선 그들은 그들만의 구호인 “일등합시다”를 외쳤다.설악산 대청봉은 6년 전 박 사장이 계획한 백두대간 종주 프로젝트의 마지막 코스였다. 지리산 성삼재를 시작으로 덕유산, 소백산, 속리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까지. 전 임직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매년 2박 3일 동안 40여km를 걸어, 백두대간 종주라는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박 사장은 등반대원 중 가장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 종주 내내 행렬의 맨 앞에서 임직원들을 이끌었다. 한 차례도 종주 행사에 빠진 적이 없고, 다른 편한 길을 간 적도 없었다. CEO라고 특별대우는 애당초 있을 수가 없었다.300km 대장정을 이끌며 박 사장은 어느 곳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코스였던 설악산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희운각 대피소는 설악산 구간 중 가장 험난하기로 유명한 공룡능선으로 향하는 들머리에 있다. 대원들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박종원 사장과 집행부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오전의 대청봉 상황을 비추어볼 때 공룡능선은 그 못지않은 강풍이 불 것이라는 희운각 대피소 직원의 말을 들은 박 사장의 머릿속은 복잡했다.“공룡능선은 마니아들이나 아는 험한 곳입니다. 강풍에 안경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밀어붙이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직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가겠다는 겁니다. 전날부터 몸에 이상이 있던 여직원과 집행부 몇 사람을 빼고 전부 산으로 올랐죠.”희운각 대피소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30여분 올라 무너미고개에 이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서 설악산이 제 속살을 드러냈다. 공룡 등뼈 모양을 한 1275봉과 나한봉 등의 바위 봉우리들이 출렁이듯 비경을 만들고 있었다.“등산은 인생과 같습니다. 힘든 고비도 있지만 그걸 넘기고 정상에 오르면 온 천하를 내어주거든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정상에 오르면 또 다른 정상이 앞을 가로막지요. 가다 보면 고비가 오고, 고비를 넘겨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인생도 힘들게 꽃을 피우지만 마지막에는 소프트 랜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인간만사가 다 이와 같습니다.”박 사장은 1976년 당시 재무부에 들어가던 시절부터 산을 탄, 등산 마니아다. 그는 종종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등산을 경영에 비유한다. 위기에 직면한 코리안리를 지금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의 경영철학을 등산경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1998년, 박 사장이 사장으로 취임하던 무렵은 외환위기의 여파로 코리안리가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시기였다. 그는 CEO로 취임하자마자 풍전등화에 처한 조직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는 한편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경쟁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설립 후 36년간 순익 누계액이 827억 원에 불과하던 회사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순익 누계액이 5189억 원의 회사로 환골탈태했다.관료 출신 CEO로 눈부신 경영성과를 이끌어낸 이면에는 박 사장 특유의 경영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박 사장 스스로도 “창의적 경영이 취미”라고 할 정도로 그의 경영철학은 독특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종원의 등산경영’이다.2004년 처음 백두대간 종주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했을 때만해도 임직원들은 반신반의했다. ‘한 두 번 하다 말겠지’,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 하는 반응이었다. 흡사 2000년 코리안리가 외환위기의 여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안정권에 든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라며 안주하려던 것이다.“2004년 종주를 시작하며 제가 그랬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임직원들이 자신의 한계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깨닫고 그 한계를 극복하며 성취감을 느끼기를 바란다고요. 하지만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도 임직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미리 단정하고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그러나 한 고개, 두 고개를 넘어서며 직원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리산 31km를 종주하고 이듬해 백두대간에서 가장 험하다는 덕유산을 종주하며 반신반의하던 직원들에게 확신이 심어졌다. 거친 음식과 열악한 잠자리를 견디며 정상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등산을 통해 얻은 자신감과 태도의 변화는 단기적인 경영성과로 이어졌고, 단기적인 성과는 장기적인 목표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2020년 세계 10위 재보험사 도약’이라는 ‘비전 2020’에 대한 믿음과 원동력이 생긴 것이다.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익은 아이디어라도 의도적인 행동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 관리자와 경영자의 책무이다. 그런 조직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을 이뤄낼 수 있다고 박 사장은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조직원 상하 간 또는 부서 간 동료애를 바탕으로 한 융합이 전제되어야 한다. 코리안리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상하 간 벽허물기, 열린 간부회의,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특히 백두대간 종주는 사무실에서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후배가 같이 조를 이루어 땀을 흘리고, 짐을 나누고, 식사를 준비하고, 부대끼며 텐트 속에서 같이 자면서 동료애와 조직 융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박 사장은 그것을 동료애를 넘은 전우애라고 말했다.정상을 향해 험한 산길을 걷다보면 무엇보다도 힘이 되는 것이 같이 길을 가는 동료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단지 함께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품안에서 들어서면 자신의 나약함, 자연에 대한 경외감 등을 느끼게 된다.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함께 대처하면서 동료와 선후배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조직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등산을 하면서 술자리도 달라졌습니다. 술자리에서 ‘등산’이라는 공통의 이야깃거리가 생긴 거죠. 대부분의 술자리는 회사 욕하고 상사 흠담하는 자리잖습니까. 그런데 산에 같이 오르면 무용담에서 감회까지 할 얘기가 좀 많겠습니까. 그만큼 술자리가 건강하게 바뀌는 거죠.”술자리가 줄어들고 직원들의 체력이 좋아진 것도 등산이 가져온 변화다. 평소 몸 관리를 하지 않으면 2박 3일, 힘든 등반 일정을 소화하기 어렵다. 때문에 평소 체력 관리하지 않을 수 없다.만능 스포츠맨인 박 사장은 유달리 체력을 중시하는 CEO이다. 체력을 직원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이다. 박 사장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세 가지를 눈여겨본다. 실력과 건강한 정신, 그리고 건강한 육체가 그것이다. 실력과 건강한 정신을 겸비했더라도 육체적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게 박 사장의 생각이다.코리안리가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코리안리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취업설명회, 서류전형, 실내면접과 함께 야외 면접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야외 면접은 코리안리 입사시험의 백미이다. 코리안리는 야외 면접을 통해 직원의 인성과 체력을 평가한다.“난 사람은 많지만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쟁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경쟁력이 상생이 아닌 독주만을 추구한다면, 그들이 모인 기업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코리안리와 같이 소수정예의 조직에서 필요한 인재는 무엇보다 상생의 경쟁력을 갖춘 인재입니다.”박 사장은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해 코리안리에 입사한 직원들을 데리고 워크숍을 떠난다. 워크숍 장소는 스키장. 워크숍에서 박 사장은 직접 직원들에게 스키를 가르친다. 사실 그는 경력 30여 년의 베테랑 스키어이다.자녀들에게 스키를 가르쳐 주러 갔다가, 심심해서 타기 시작했다. 코치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탔다. 스키가 몸에 익숙해진 뒤에는 교습 비디오를 보며 스킬을 배웠다. 그렇게 30여 년을 타다보니 ‘스키에 몸을 맡기는 수준’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그는 스키는 두 발이 아닌 한 발로 타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턴을 할 때 한 발은 그저 균형만 잡는 역할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자신이 중상급 이상의 실력을 갖추었기에 직원들을 가르칠 수 있다. 코리안리는 매년 스키장으로 신입사원 워크숍을 간다. 때문에 직원 중에 스키를 못타는 사람이 없다. 열댓 명의 직원이 한 줄로 서서 슬로프를 내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스키도 경영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자기 실력을 과신해 지나치게 속력을 내다가는 넘어지고 맙니다. 속도조절과 함께 주위상황도 살펴야 합니다. 시장 환경을 파악하고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경영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제규모가 커지면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등산, 스키 등을 통해 박 사장은 신선하고 활기찬 기업문화를 만들었다. 지난 10년 코리안리가 이룬 성과는 이 같은 변화와 혁신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박 사장은 지금까지의 성취에 자만하지 않고 2020년 ‘글로벌 탑 5’ 달성을 위해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세상을 향한 도전은 끝이 없어 보인다.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재정경제부 공보관14회 행정고등고시미국 밴더빌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전공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