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에서 U턴을 할 때면 항상 묘한 기분이 든다. 신호가 떨어지면 맨 앞에 있는 차부터 차례대로 돌아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개는 뒤에 있는 차들이 먼저 방향을 돌린다. 그래서 U턴을 하고 나면 순서가 거꾸로 바뀌어버린다.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게 문제지만 뒤에 있는 차는 신호가 빨리 바뀔까 봐 아무래도 조급해지게 마련이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중세가 해체의 조짐을 완연하게 보이던 15세기 이베리아도 그랬다.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있는 이 지역은 8세기부터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 내내 북아프리카를 서쪽으로 질주하던 이슬람 세력이 좁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접수한 것이다. 지금의 프랑스 서부에서 프랑크족이 차단한 덕분에 서유럽은 방어했으나 그 남쪽은 15세기까지 이슬람 문명권이 되었다.800년 동안이나 레콩키스타(국토수복운동)를 벌인 끝에 이베리아는 드디어 1492년 봄 아랍 세력을 아프리카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수백 년 동안 이교도의 지배를 받다가 기독교권의 막내로 간신히 편입된 이베리아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한참 뒤졌다고 판단하고 역전을 위한 승부수를 띄우기로 한다. 지금으로 치면 교차로에서 U턴을 준비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먼저 치고 나간 것은 포르투갈이다. 레콩키스타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15세기 초에 포르투갈 왕자 엔리케는 사재를 털어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는 항로 개발에 주력했다. 물론 동방 무역을 겨냥한 포석이다. 그런데 지중해를 놔두고 왜 그랬을까? 당시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은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잡고 있었다. 아라비아 대상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향료,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시리아 연안까지 육로로 실어오면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선박으로 서유럽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부를 기반으로 북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만개할 수 있었다. 이 알짜배기 지중해 비즈니스에 명함을 내밀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오랜 기간의 이슬람 지배가 낳은 후유증이다.엔리케는 아프리카 서단의 베르데 곶과 대서양 항해의 기점인 아조레스 제도를 개척해 신항로 개발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결과를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 뒤 포르투갈은 1488년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고, 다시 10년 뒤 드디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가는 데 성공했다. 비록 지중해 무역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지만 이제 이탈리아의 무역 독점은 새내기에 의해 무너졌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얻는 노예와 상아는 항로 개척의 짭짤한 부산물이다.향료 무역은 배 여섯 척을 보내 다섯 척이 난파하고 한 척만 돌아와도 떼돈을 벌 정도로 수익성이 좋았다. 신항로를 통한 향료 무역은 말 그대로 ‘벤처 사업’이었다. 그 무렵의 해도를 보면 바다 곳곳에 괴물들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용돌이나 암초가 있는 해역을 그렇게 묘사한 것인데, 그야말로 미지의 바다였으니 항해를 출발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오늘날의 벤처는 목숨을 걸지는 않지만 초창기의 벤처는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탄생한다.서양 문명의 두 가지 결실은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이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양의 경우 그 두 가지가 발달한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자본주의라고 하면 흔히 생산과 유통의 측면을 생각하지만 실은 자본주의의 가장 농밀한 부분은 금융이다. 싸게 만들어 비싸게 판다(산업자본주의),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상업자본주의)는 원칙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경제 관습일 뿐 자본주의의 본령은 아니다.동방 무역에 매진한 북이탈리아와 이베리아의 역사를 보면 그 점이 명백해진다.향료 선단을 보내려면 최소한 배 세 척에 한 척당 선원 스무 명이 필요하다. 이들이 적어도 6개월, 길면 1년 이상 바다에서 보내야 하므로 인건비와 보급품도 만만치 않다. 아무리 고수익이 예상되는 사업이라 해도 밑천이 많이 드니 함부로 꿈꿀 수 없다. 엔리케 왕자나 부호들은 자비를 들여 개인적으로 선단을 꾸렸다. 그럴 만한 돈은 없는데 향료 무역에 참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중소 상인들은 자연스럽게 몇 명이 돈을 모아 공동으로 투자한다. 이것이 창업투자의 원조다.장거리 무역인 만큼 금세 수익이 발생하는 게 아니다. 이른바 자본의 회임 기간이 길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창업투자에 참여한 사람이 중간에 다른 일로 급전이 필요해질 수도 있고, 무역 선단이 돌아오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증권이라는 제도가 생겨난다. 투자 증서를 타인에게 양도해 돈을 구할 수도 있고, 투자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가족에게 상속시킬 수도 있다.그렇잖아도 위험성이 큰 사업이다. 자칫 모르는 해역으로 빠져들거나 심한 풍랑이나 암초를 만나면 선단이 몽땅 침몰해버릴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투자자들이 돈을 다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요령이 생긴다. 무역 선단이 출발하기 전에 일정한 금액을 내면 난파할 경우 투자금을 돌려주겠다는 아이디어 사업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보험이다.은행은 그보다 조금 먼저 북이탈리아에서 생겼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북이탈리아의 항구 도시에서 너도나도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자 일부 상인들은 무역에서 손을 떼고 동료 상인들의 돈을 관리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것이 은행의 기원이다. 처음에는 돈을 맡은 상인이 떼어먹고 달아나는 도덕적 해이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은행이 제도화되고 신용이 쌓이면서 그런 일이 점차 줄어든다. 투자와 대출 기능까지 하는 은행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부터 시작되지만 그 맹아는 이미 14~15세기 북이탈리아에서 싹텄다.이렇듯 벤처, 창업투자, 증권, 보험, 은행 등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시스템은 서구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역사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발달했다는 점이다. 모든 제도가 어느 누구의 치밀한 계획으로 고안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성에 따라 탄생하고 숙성되었다. 바로 그것이 오랜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늘 지배층의 의식적인 계획으로 국가 중대사가 결정되어온 동양 사회와 크게 다른 점이다.물론 동양 사회의 제도와 관습도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양과 비교해 열등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지금 우리가 서양에서 유래한 제도--특히 정치적 의회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경우와 달리 오랜 기간 숙성되어온 게 아니라 외부의 것이 단기간에 이식된 것이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길게 잡아야 일제 강점기부터이고, 우리의 의회민주주의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렇게 연혁이 짧은 만큼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1897년 한성은행이 최초의 은행으로 설립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내 피붙이도 없는 은행에 어떻게 돈을 맡기냐”며 장롱 속의 돈궤를 버리지 않았고, 대통령은 왕이 아닌데도 1950년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나랏님을 어떻게 백성들이 뽑느냐”며 머뭇거렸다. 외부의 것이 토착화되는 데는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비록 남의 옷을 입었더라도 부작용을 줄이는 일은 나의 몫이다.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