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이숙자 & 선화랑 김창실 대표

보리밭의 화가 이숙자 선생과 원로 갤러리스트 선화랑 김창실 대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인연을 이어온 미술계의 단짝이다.2007년 강단에서 정년퇴임 후 작품활동에 몰두하고 하고 있는 이숙자 선생의 일산 화실로 김 대표가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유로를 타고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이숙자 선생의 화실은 주택가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6층 화실에서는 주택가와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이 선생은 김창실 대표도 곧 올 것이라고 커피를 권했다. 힘겹게 자리를 앉으며 그는 올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작품활동을 별로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최근 3년은 무리를 한 게 사실이다. 2006년 파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7년 정년퇴임 기념전, 2008년에는 고양시 아람누리에서 회고전을 치렀다. 그간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열과 성을 다해 작품 활동에 임했다.“그간 좀 무리한 게 사실이에요. 저는 화실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작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러니 얼마나 정년을 기다렸겠어요. 집이 있는 분당까지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작업에 매달렸거든요.”그는 동기들에 비해 좀 늦은 1980년 한 해 국전과 중앙미술대전에서 동시에 대상을 받았다. 그때는 통과의례처럼 그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큰 상을 받고 자신의 작품을 하고 싶었지만 대학에 몸담다 보니 욕심껏 작업을 하지 못했다. 정년퇴임을 손꼽아 기다린 이유다.정년퇴임 직후 그는 모든 시간을 오롯이 작품활동에 매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고 했다. 생각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 같았고, 모든 시간이 축복으로 다가왔다. 시간의 축복 속에서 보리밭도 새롭게 보였다. 보리밭 화가로 40여년간 보리밭을 봐왔지만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낀다는 이숙자 화백. 보리밭의 매력에 빠져 퇴임 후 한동안은 김포의 보리밭에 캔버스를 펴고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는 피곤한 줄도 몰랐다.그러나 욕심이 지나쳤던지 회고전 이후 몸에 이상이 찾아왔다. 한껏 고양된 기분에 작품에 욕심을 낸 것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먼저 오른팔이 아파왔고, 뒤이어 기관지와 폐도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그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은 듯하다고 말했다.“그전까지 몸을 부렸다면 이제부터는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작품하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다른 데 취미를 붙이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웃음).”수줍은 웃음 뒤에 그가 “마무리해야 할 작품이 많다”고 다짐 섞인 말을 할 즈음 선화랑 김창실 대표가 화실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으며 김 대표는 “오늘은 이숙자 선생이 주인공이니까 내가 일부러 늦게 왔어요”라고 말했다.“이숙자 선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만큼 이이를 아끼고 좋아하거든. 이 선생은 지금보다 나중이 더 기대되는 작가예요. 재능만 보면 천경자 씨 버금가는 이예요.”칭찬으로 인사를 대신한 김 대표는 커피를 마시며 이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 선생도 김 대표의 안부를 물었고, 이어 먼길을 와 준 김 대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잠깐의 안부 후 두 사람은 근처 낙지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정담은 음식을 주문하고 밑반찬을 내오는 분주함이 가라앉은 후 다시 이어졌다.이숙자 선생(이하 이) : 선화랑에서 처음 전시회를 한 게 가락제였죠? 83년인가 그랬는데, 개인전은 아니고 기획전이었어요. 김 사장님이 저희보다 열 살 정도 위세요. 그때가 40대이셨는데, 피부가 너무 좋은 거예요. 저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요.김창실 대표(이하 김) : 그러고 88년에 선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전 다른 화랑에 있는 작가들하고는 전시회는 잘 안 해요. 그 전에 이 선생이 다른 화랑이랑 계약이 돼 있었거든요. 그림이 너무 좋으니까 같이 하자고 제가 제안을 했죠.이 : 그때나 지금이나 제 작품이 주로 대작이예요. 88년 개인전도 대작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림을 팔아야 이익이 남는 갤러리 입장에서도 반길 일은 아니죠. 그래도 김 사장님은 흔쾌히 전시회를 열어주셨어요.김 : 그런 그림은 팔려는 그림이 아니예요.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화랑은 그런 좋은 작가들을 키워줘야 해요.이 :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예요. 오죽하면 전시회 첫날 다른 화랑 관장님이 오셔서 “그림이 다 대작이면 화랑은 뭐 먹고 사니?” 그러셨겠어요. 김 사장님이시니까 흔쾌히 걸어주신 거죠. 김 사장님은 확실히 작가를 배려하고 아껴주시는 분이세요.김 : 이 선생이 보리밭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여인의 누드를 많이 그렸어요. 처음 이 선생 그림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마음에 와 닿았어요.이 : 88년 개인전 때도 누드 작품이 있었어요. 80호짜리 누드였는데 천경자 선생님이 그 그림을 보시고는 손으로 음모를 가리시며 ‘이건 출품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천 선생님 말씀 듣고 일단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너무 아쉽더라고요. 제 딴에는 대표작이라고 생각한 작품이었거든요. 김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걸자고 하시는 거예요.김 : 작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면 걸어야죠. 그래서 제일 좋은 자리에 걸었어요. 그 그림은 세밀한 음모가 특징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하면 되나요. 누구 뭐 음모 못 본 사람 있나요?(웃음)이 : 개인전을 할 때였는데,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면서 우시는 거예요. 그림이 안 팔려서 우시는 줄 알고 얼마나 미안했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이유 때문에 우셨다고 하시더라고요.김 : 그때 같이 살던 둘째 아들이 분가를 한다고 해서 속이 상해서 운 거였거든요. 작가를 알아보고 작가의 길을 터주는 게 화랑이 할 일인데, 그만한 일로 속상해하면 되나요. 그때도 몇 점은 팔았어요. 소 그림은 기업체 사장이 좋다면서 덥석 사갔거든요.2008년 회고전에서 그 작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처음 그 작품은 150호짜리 4폭으로 구상했지만, 몸에 무리가 와서 2폭만 그렸다. 나머지 2폭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그녀는 최근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현재는 종이만 걸어놓은 상태다.대작을 하다 보면 몸살을 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품에 혼을 불어넣다보니 어떤 때는 그림이 안 팔렸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화랑에는 미안하지만 작가 스스로는 마음이 편할 때도 있다. 그러다 작품이 팔려나가면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다. 그이에게 작품은 그냥 분신이 아니라 생명이며 에너지인 것이다.이 : <백두산>이 그런 작품이에요. <백두산>은 원래 1991년, 제가 40대를 마감하며 구상한 작품인데, 그때는 직접 가보진 못했어요. 2001년 기회가 생겨, 직접 가서 백두산을 보니까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영산, 그 자체였어요. 그때 그 감흥을 150호 8폭에 담은 게 <백두산>이에요.김 : 이숙자 선생은 아프기도 잘해요. <백두산> 그릴 때도 병원에 입원했던가 그래요. 굉장히 센시티브한 사람이야.이 : 큰 작품은 사다리에 올라가서 그리기도 하거든요. <백두산>을 그리는 데 동생이 와서 보고는 “언니, 이런 힘든 작업 그만하면 안돼” 그러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거예요.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면서 정신을 잃은 거죠. 그 길로 구급차에 실려가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어요. <백두산>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에요.김 : 그걸 보여주며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데 우리 화랑에서는 불가능해요. 처음에는 예술의 전당을 대관해서 하려다, 조선일보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죠.이 : 처음에는 <백두산>이 한쪽 벽에 걸려있었어요. 대표작이니까 정면에 걸렸으면 하고 내심 바랐거든요. 그때 김 사장님이 오시더니 “저걸 정면에 걸라”고 하셨어요. 그때 ‘이 분은 정말 스케일이 크신 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김 : 좋은 작품은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전혀 못 판 것도 아니예요. 경기 좋을 때 제법 팔기도 했어요. 그래도 미안한지 이이는 전시회 할 때마다 “나중에 이 은혜 꼭 갚은 꺼예요”라고 그래요. 그런 마음이 고맙잖아요.이 : 김 사장님이야 화단을 위해 워낙 좋은 일을 많이 하시니까요. 작가들 경조사에 거의 안 빠지시고. 저희로선 고맙고 본 받을만한 분이죠.김 : 이이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예요.이 :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하지는 못했지만 제 한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100호 안팎의 작품을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