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독특한 역사서로도 유명하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제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라틴어 문구라서 어딘가 폼 나 보이지만 호모 루덴스란 사실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놀이를 문화의 일부분으로 보는 게 상식이었으나 호이징가는 반대로 문화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놀이는 문화의 한 하위 분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범주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놀이는 일에 못지않게, 아니 일보다 더 중요한 측면을 가진다. 실제로 호모 루덴스의 관념이 널리 퍼지면서 놀이가 일과 배리되기는커녕 오히려 일의 능력을 진척시킨다는 이론이 힘을 얻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늘 아이들은 놀이보다 공부를, 어른들은 놀이보다 일을 중시하지만, 정작으로 공부와 일의 발전과 성숙을 저해하는 원인은 바로 호모 루덴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아닐까?메이저리그의 투수로 활약하는 박찬호가 슬럼프를 겪었을 때 그의 멘토 역할을 했던 고참 투수 오렐 허샤이저는 박찬호에게 “너는 기량 면에서는 뛰어난데 야구를 즐길 줄 모른다”는 충고를 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마운드에 선 박찬호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할 정도였다. 승부를 업으로 삼는 프로선수가 승부에 진지하게 임하는 게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문제는 지나친 집착이 오히려 승부에도 역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지나친 엄숙주의 때문인지 그는 언제나 승부를 의식하며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그는 승부의 주인이 아니라 승부의 노예가 될 것이다.‘야구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허샤이저의 말은 단순히 긴장을 풀고 즐겁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후배의 정신적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 충고한 게 아니라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기 위해 충고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량이 어느 정도의 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집착에 가까운 집념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재능 있는 자가 노력하는 자를 따르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점에서는 스포츠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비즈니스든 마찬가지다.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사랑보다는 성공, 권위, 돈, 권력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모든 정력을 사용하고 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줄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긴, 고기도 많이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 했던가?놀이도 사랑이나 고기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구나 놀 줄 아는 것 같아도 실은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노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어렸을 때 누구나 지나칠 만큼 많이 해봤던 게 놀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놀 줄 모른다는 말은 방법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놀아본 경험이 부족하고 특히 고급한 놀이에 대한 지향이 없다는 이야기겠다.아무렇게나 놀기 위해서라면 굳이 기술 따위가 필요할 리 없다. 그러나 투자에 비례해 수익이 나온다는 것은 경제의 원칙만이 아니다. 특별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놀이는 쉽게 숙달될 수 있지만 그만큼 쉽게 질리는 법이다. 그에 비해 어느 정도의 훈련과 정력을 할애해야만 할 수 있는 놀이는 훨씬 지속적이다. 따라서 의외로 ‘난이도’가 높은 놀이일수록, 완성에 이르기가 어려운 놀이일수록 놀이로서의 가치가 크다(바둑과 골프가 대표적인데, 둘 다 실력이 늘수록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또 실력이 늘수록 한 단계 더 올리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이를테면 술을 마시는 것과 시를 감상하는 것은 어떤 게 더 좋은 놀이일까? 실제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철학자가 있었다. 19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섯 잔의 맥주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중 어느 것이 더 큰 쾌락을 줄까?”를 물었다. 술을 마시는 ‘놀이’가 훨씬 배우고 익히기가 쉽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셰익스피어의 시를 감상하는 ‘놀이’보다 재미가 더하다는 증거는 사실 없다(다만 셰익스피어의 시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일정한 훈련이 필요한데, 그 훈련은 결국 충분한 보상으로 돌아온다).그래서 밀은 두 가지 경험을 모두 판단할 수 있는 유능한 판관들을 불러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밀의 의도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삼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하려는 데 있었다. 행복의 양만 강조하고 질을 무시하는 공리주의를 채택하면, 문화조차도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천박한 민주주의가 판을 칠 테고 고급문화의 전승과 보존은 불가능해질 것이다(현재 우리 사회 정책 입안자들의 자세가 대체로 그런 위험을 보이고 있다). 밀은 그 문제를 투표에 부칠 경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맥이 끊기고 말리라고 보았다.아예 노는 일이 직업이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노래나 춤을 업으로 삼은 가수나 게임이 직업인 프로게이머라면 일과 놀이의 완벽한 합일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동창회에서 가수를 하는 친구에게 노래 한 곡 불러보라고 하면 그것처럼 눈치 없는 짓도 없다. 따라서 남들은 놀이로 여기는 것을 직업으로 가졌다면 오히려 삶의 큰 부분을 잃은 불행한 사람이다.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직업마저 그럴진대 일과 놀이가 너무도 명확히 구분되어서 탈인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일하는 나’와 ‘노는 나’를 구분해야만 한다면, 일과 놀이에 항상 주인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과 놀이에서 모두 소외되지 않을 수 있고 놀이의 생산성을 찾을 수 있다.물론 놀이에 관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생산적인 놀이는 없다. 게다가 고급한 놀이일수록 숙달하기가 어려우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예컨대 악기를 배운다고 해서 누구나 연주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타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누구나 세고비아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류의 솜씨를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일류의 참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4인조 실내악을 완주하기 위해 땀 흘려 연습하는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에게 “세고비아의 음반을 듣지 왜 고되게 그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큰 결례인 동시에 스스로 문화인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만 드러낼 뿐이다.일과 놀이가 완전히 분리되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이중생활을 하게 되거나, 일도 놀이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은 롤르봉 후작이라는 프랑스 역사상의 한 인물을 ‘취미로’ 연구하는 아마추어 학자다(그는 연금생활자였으므로 부자는 아니어도 생활 전선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그 연구는 나중에 그에게 자신의 실존, 즉 존재의 무근거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연구 주제로 택한 롤르봉은 결국 그 자신의 무근거를 메우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존재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임을 깨닫고 구토한다.어차피 로캉탱처럼 호사스런 팔자가 아닌 우리 대다수는 일에서 유리된 채 살아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일의 양면성(생산성과 중독성)의 균형을 맞춰주는 놀이를 등한시한다면 일은 결국 중독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로캉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이에 중독되었다가 자신의 실존을 체험했다. 로캉탱과 반대 입장에 있는 우리는 놀이를 완전히 잊고 일에 중독된 채 살아가다가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로캉탱보다 더 비참하게 구토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