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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일기와 편지는 물론이고 대학입시 논술에서부터 직장의 승진시험, 프레젠테이션, 나아가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는 글과 댓글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글쓰기는 단순히 취미나 솜씨의 차원을 넘어 실용적인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엄밀히 말해서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소통이다. 일기는 원칙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기만 보는 글이므로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심지어 문법과 어휘까지 새로 만들어 써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밖에 모든 글은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입시용 논술도 채점자를 독자로 겨냥하고 있으며,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로 필자가 바로 당신을 독자로 삼고 쓴 글이다.그래서 글쓰기에 첫 번째로 요구되는 사항은 일관성이다. 일관적인 논리에 의거하지 않고 제멋대로 쓴 글이라면 독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상식적인 글쓰기가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면 어떨까? 창작이든, 논문이든, 보고서든 모든 글의 소재는 현실이다(혹은 현실에 기원을 둔 상상이거나). 즉 글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현실 자체가 근본적으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면 어떨까?그렇다면 일관적인 글은 오히려 좋은 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는 사전적인 의미의 일관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다. 어떤 의미에서 일관성이 아니라 모순과 분열이 정상인 사회다.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상품 광고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광고의 목적은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를 촉진하는 데 있다. 또한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의 제조업은 대량생산 방식으로 상품을 제조한다. 자본주의 초기,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상품을 대량생산하면 비용을 낮추고 시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정치, 경제,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지배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개인의 특성, 즉 개성이 강조되는 풍조를 맞아 상품에서도 개별성과 고유성이 중요해진 것이다.사실 자본주의가 분열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광고보다 더 근원적인 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사회의 역사를 분석한다. 역사상 존재했던 인류 사회는 모두 나름대로 욕망을 조절하는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욕망의 흐름들을 조절하고 통제해야만 사회가 성립할 수 있고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조절 방식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코드화라고 부른다.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 집단은 욕망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발산되므로 코드 자체가 없다. 물론 코드가 없으니까 코드화도 필요가 없다. 동물 상태를 막 벗어난 원시 사회에서부터 욕망은 통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각각에 어울리는 다양한 코드로 통제하는 식이다. 즉 통제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어떤 중심이 들어서서 욕망을 본격적으로 통제하게 되는 시기는 고대 사회다. 여기서는 왕이라는 전제 군주가 코드화의 중심으로 기능하면서 욕망이 통제된다. 어느 문명권이든 고대에 최초로 국가가 탄생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군주 시대와 같이 하나의 강력한 중심으로 초코드화할 수 없을 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왜 그럴까? 군주 대신 시장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지배만 고려한다면 강력한 중심이 있는 편이 유리하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런 중심이 있다. 바로 자본이다. 하지만 자본이 기능하려면 반드시 자본을 투입해 생산한 상품이 판매되어 이윤을 낳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 판매를 담당해주는 것은 익명의 대중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지배는 하고 싶어도 과거와 같은 획일적인 지배 구조를 취하지 못한다.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의 딜레마가 있다. 욕망을 억제하면 시장이 위축되고, 욕망을 마냥 내버려두면 무질서해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초코드화와 더불어 다원적인 코드화도 구사한다. 초코드화의 중심은 자본이며, 다원화된 코드화는 국가, 학교, 병원, 교회, 정치 조직, 병원 등의 다양한 기관이 담당한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욕망을 무제한으로 조장하면서 다른 손으로 욕망을 고도로 통제하는 체제이며, 그렇게 해야만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는 모순에 찬 체제다.사실 자본주의의 이런 이중성과 분열성은 자본주의의 발생기부터 존재했다. 중세 봉건 사회를 해체하고 생겨난 자본주의는 초기 발전을 위해 우선 중세 영주가 장악한 노동력을 해방시켜야 했다. 자본주의의 주체인 신흥 상인계급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원하고, 신분제의 폐지와 인권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영주의 장원에서 풀려난 농노들은 신흥 도시로 몰려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했다. 즉 노동자들은 신분으로부터의 자유와 토지로부터의 자유라는 이중적 자유를 얻었다. 또한 도시에 온 노동자들은 정치적, 법적 권리를 얻어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동시에 자본에 (자발적으로) 고용됨으로써 새로이 속박되었다.자본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지만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자본에 고용된 대중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대중을 마냥 쥐어짜 이윤을 수취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그럴 때는 늘 생산과잉으로 인한 경제공황이 일어났다(이 경우 1930년대 미국이 그랬듯이 부족한 수요를 충당하고 실업을 완화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당장 필요가 없는 사회적 설비라도 건설해야 한다. 이른바 ‘4대강 개발사업’ 같은 국책사업에는 이런 메커니즘도 있다). 대중이 부유해지면 자본의 상당 부분이 대중에게 돌아가므로 자본의 축적이 어려워지고, 대중이 빈곤해지면 상품을 구매하지 못하므로 이윤의 실현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자본은 항상 교묘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분열증이 나온다.분열증은 물론 정신질환의 하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 사회, 고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 각각 정신장애를 대입한다. 욕망이 대지에 고착된 원시 사회에서는 욕망과 대상이 일체화되는 도착증이 생겨난다. 초코드화가 진행되는 고대 사회에서는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는 편집증이 일어난다. 초코드화와 탈코드화가 병행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분열증이 지배적이다. 바꿔 말해 자본주의는 분열증이 비정상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상적인 사회다.근대 사회에서는 이성, 의식, 확실성, 일관성, 연속성 같은 개념들이 지배했다면 현대 사회는 그 대신 언어, 무의식, 불확실성, 모순, 단절 같은 개념들이 지배한다. 기계적 인과성과 필연성이 약화되고 그 대신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이 중시된다. 놀랍게도 이 점은 철학이나 역사만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의식 현대 물리학의 사유와도 통한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섰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우연성의 관념을 거부했으나, 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닐스 보어는 “우연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리학 법칙의 일부”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확과 정밀을 중시하는 과학에서도 우연의 계기가 고려되어야 하는 실정이다.여기서 다시 글쓰기의 문제를 보자. 지금 좋은 글의 기본이라고 평가되는 ‘일관적인 글’이 실제로 좋은 글일까? 아니, 그보다도 그런 글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일관적인 글과 논리적인 사고가 미덕이던 시대는 갔다. 과거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일관성과 명쾌한 논리는 오히려 독창성과 창의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획일성보다 다양성이, 불변성보다 가변성이, 안정보다 변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자본주의적 분열증을 환영하든 반대하든 이제 모순과 불일치, 불화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오히려 모순에서 비롯되는 생산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창조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쓰기도 그렇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도 마찬가지다.<발문>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욕망을 무제한으로 조장하면서 다른 손으로 욕망을 고도로 통제하는 체제이며, 그렇게 해야만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는 모순에 찬 체제다.<저자>남경태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