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1797~1858)는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였다. 그는 에도(江戶)에서 세습적인 직업으로 불 끄는 소방관 일을 담당했던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다. 히로시게의 걸작 <명소강호백경(名所江戶百景)>에서 19세기 에도의 풍경 100곳을 엄선하여 제작한 우키요에로 기타가와 호쿠사이(葛路北齋)의 <부악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에 비견할 만큼 매우 개성적이고 독특한 작품이다. 그는 전통적 일본 그림에서부터 서양의 회화기법까지 두루 익히고 새로 개발된 교토와 나라를 있는 도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현실감과 현장사생을 극대화하여 무수한 걸작을 만들어 낸다. 히로시게는 자신의 작품이 파리의 문화계와 인상파 화가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막강한 영향을 전해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영원히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를 수도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에도는 습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후 100년 동안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의 다른 어떤 도시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정치, 군사, 경제적 힘을 갖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의 에도는 문화적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17세기와 18세기 초에 비단, 칠기, 도자기, 그림과 같이 호화로운 물건들은 주로 오사카를 경유하는 뱃길을 통해 교토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낙후된 문화는 당시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서 에도에서도 팔릴 수 없는 제품을 일컫는 말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볼품없는)’라는 경멸적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였다.하지만 에도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던 새로운 양식의 미술, 즉 우키요에가 전통적인 교토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과 대량생산 방식에 따른 값싼 수요공급으로 서민들의 애호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되었다. 여기에는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의 개설과 그로 인한 빈번한 여행과 물자의 교류로 인한 경제적 여유도 큰 몫을 담당했다.에도시대에는 무사들이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교토부터 수도 에도까지 두 지역을 잇는 도카이도(東海道) 같은 도로가 발달하였다. 그 결과 사무라이 귀족계급뿐 아니라 승려와 일반인들까지 여행이 빈번해 졌다. 산야의 사찰과 신사와 경승지를 순례하는 것이 대중화 되었지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는 동부의 거대한 수도 에도였다. 여행의 증가는 교통 숙박, 식당, 지도, 여행지침서 및 기행문학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고, 일종의 실경산수화에 대한 대중적 수요를 낳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도의 많은 출판가들은 관광객에게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에도의 중심 니혼바시(日本橋)로부터 주요 간선도로의 교차지역 부근에 있는 도시의 외곽지역으로 가게를 옮기거나 새롭게 지점을 개점했다. 오랫동안 에도의 독특한 상품으로 여겨져 왔던 목판화는 이 시대에 들어 에도 방문객들을 위한, 비싸지 않지만 훌륭한 기념품으로 점점 시장을 넓혀 갔다.히로시게 자신이 직접 여행하면서 사생과 인상을 담아 제작한 목판화는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전통을 활용하여 신사와 사찰, 찻집과 식당, 극장과 가게, 강과 운하 같은 분주한 일상의 모습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히로시게는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뛰어난 색채를 이용하여 각 화면마다 신선함과 함께 따듯한 서정성을 부여했다. 호쿠사이가 후지산 연작을 통해 우키요에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같이,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했던 히로시게는 에도시민과 여행객, 나아가 유럽의 일본애호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히로시게는 말년에 야심찬 <명소강호백경(名所江戶百景)> 판화를 제작하였다. 제목이 시사 하는 바와 같이 이 연작은 에도의 명소를 백군데 정하고 목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히로시게 화력 오십년의 총 결산인 셈이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고흐의 일본그림 모사 원본인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와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가 있다. 이 가메이도 매화그림은 히로시게가 절필하기 1년 전인 1857년 작으로 히로시게 최고의 걸작으로, 원숙한 필치와 대범한 구도, 일본다운 색채는 세대와 지역, 인종을 뛰어넘어 누가보아도 멋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1887년 파리, 고흐는 동생 테오의 소개로 알게 된 화방 주인인 쥴리앙 탕기 영감으로부터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됐다. 고향 네덜란드의 준데르트나 런던과 헤이그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그림이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와는 사뭇 다른 얇은 일본종이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는 구도의 대담함과 선명한 색감 강렬한 칼라가 한창 그림에 열중인 가난한 고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한 모델이었다. 그 가운데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매화 고목에 새봄이 와서 가지에 듬성듬성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트리고, 멀리 매화농원의 매화에는 만개한 매화사이로 사람들이 매화향기를 음미하며 봄나들이를 하는 풍경이다. 고향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고, 기후가 맞지 않아 매화나무도 없던 터라 마냥 신기롭기만 하였다. 고흐는 처음 본 이 가슴 뛰는 우키요에를 그리기로 작정하고 우선 그림을 그리기 전에 다른 종이에 가로 17줄 세로 27줄의 격자 줄을 쳤다. 그리고 원화를 보고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비례로 윤곽을 따라 선을 그었다.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옮겨 칠하기도 전에 이미 고흐의 마음속에는 일본매화가 만개해 있었다.이렇게 정성껏 그림을 그리다 보니 옮기려는 캔버스와 그림크기가 안 맞았다. 원화인 우키요에가 캔버스에 비해 좌우가 홀쭉하였다. 고흐는 원화이미지를 캔버스 가운데 올리고, 좌우로 남은 여백을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자로 된, 뜻도 모르는, 심지어는 글자도 틀린 한자를 정성껏 그렸다. 완연한 고흐의 일본그림이 완성된 순간이었다.<대교에 내리는 소나기>는 고흐가 1887년 파리에서 모사한 작품으로 원작이 가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목판화의 맛 대신, 고흐의 거친 숨소리라도 들리듯 정성을 다해 작업하는 고흐의 진지함이 담뿍 묻어나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목판화 원화와 캔버스의 크기가 달라 비례가 안 맞아 고흐는 소나기 내리는 다리풍경을 가운데 두고 마치 프레임 하듯 사방을 녹색으로 두르고 붉은 선을 가늘게 둘러 장식성을 더했다. 여기에 익히 보아온 흥미로운 한자 서체를 드로잉으로 그려 넣었고 히로시게 판화의 독특한 특징인 제목과 서명의 붉은 사각 면을 테두리로 꺼내어 마무리 했다. 매화그림이나 소나기그림 모두 윤곽에 써넣은 한자어는 길원(吉原)이니 대흑옥(大黑屋) 혹은 신길원(新吉原), 강호(江戶)등의 한자어를 반복해서 그려 넣었는데 길원은 에도의 대표적 환락가였다. 고흐는 의미도 내용도 중요하지 않고 그냥 시각적 조형성만 강조하였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는 재미있다.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부국강병을 다지고, 그보다 1년 전인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일본의 참가는 유럽에서 일본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에 거세게 불어 닥친 일본열풍이 고흐에게는 정신의 환희 같은 기쁨을 주었다. 당시 유럽의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자포니즘(japonism)은 참으로 대단하여 일찍이 언급하였던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등의 화가뿐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쳤고,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남달랐다. 파리의 화구상인 쥴리앙 탕기 영감의 초상화 뒤편에 우키요에로 도배한 그림을 두 점이나 남겼고, 파리 몽마르트르의 탕부랭 술집 여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다. 그뿐 아니라 1888년 12월 23일 남프랑스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의 조우를 기대했던 고흐는 끝내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적 비극을 경험하면서도 붕대를 머리에 두른 자화상 뒤편으로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의 여인을 그린 우끼요에를 함께 그렸다. 심지어는 아를의 <밤의 테라스 카페나>나 오베르의 <밀밭 위로 내리는 소나기풍경>, 아를의 <아몬드 꽃> 그림 등 우키요에가 얼마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그 영향의 중심에 히로시게의 우키요에가 자리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히로시게의 <동해도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는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시작하여 시나가와(品川)을 거쳐 교토의 가모가와(鴨川) 삼조대교(三 大橋)까지 모두 53개역의 풍경을 그린 판화로 히로시게가 다이묘 수행원의 일원으로 도카이도를 여행하고 나서 1년 뒤인 1833년 제작했다. 히로시게의 이 연작은 큰 성공을 거두어 훗날 프랑스 문화계와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로시게는 또한 에도와 교토사이의 내륙도로였던 기소카이도(木曾街道)에 대한 <목승가도육십구차(木曾街道六十九次)>의 또 다른 연작을 제작하였다.니혼바시가 처음 설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1603년이라고 전해진다. 오늘의 니혼바시는 동경시에서 1911년 석조로 완성한 것으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교는 동경의 중심지 천황이 거주하는 코우교(皇居)와 동격역이 바로 지척에 있고 긴자(銀座)와 간다(神田)를 잇는 다리로 유명백화점과 고급전문점이 즐비한 일본 경제의 중심가에 있다. 니혼바시 북쪽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정문에는 히로시게가 그린 <강호명소준하정(江戶名所駿河町)>이라는 그림과 함께 미츠코시 백화점이 창업 336주년을 기념한다는 작은 안내문이 남색 노랭이 아래 설치되어 있다. 한 우물을 파는 일본의 기업정신의 단면이다.히로시게가 1833년 제작한 <니혼바시(日本橋)>는 긴자와 간다를 잇는 다리 위로 아침 일찍 상인과 짐꾼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나르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거의 200년 전 니혼바시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비록 다르지만 에도와 도쿄의 중심지로서의 삶의 활기는 여전하다. 역사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여 세월의 구력과 삶의 지층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한다.글·사진 최선호(화가)최선호 111w111@hanmail.net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