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뭐냐고? 그건 돈일세.” 얼핏 천박한 장사치의 말처럼 들리는 이 말은 피카소가 한 말이다. “나는 열두 살 때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호언한 당대의 작가가 내린 예술의 정의치고는 너무 세속적(?)이다. 당시만 해도 예술가의 정신이 녹아있는 예술 작품에 가격을 매기는 일은 신성불가침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가 던진 말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도발적이었다.그러나 결론적으로 그의 말은 자본주의 시대 예술작품에 대한 통찰이 숨어있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수용과 소통이 철저히 돈에 의해 지배되고, 그 가치 또한 돈에 의해 평가된다. 모든 사회 메커니즘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예술과 예술을 둘러싼 매커니즘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예술을 너무 순수하고 진지한 대상으로 우러러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 그 말에 담겨있다.현대에 와서 그의 이 말은 적어도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진리로 여겨진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미술작품은 가장 값 나가는 재화이다. 미술작품의 재산적 가치는 보유자의 경제적 지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때에 따라서는 상속이나 증여의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피카소의 천재성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사 모았다. 20세기 최고 인기 화가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컬렉터 중 한 사람이 피카소였다. 재화로서의 예술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소장한 작품을 쉽게 되팔지도 않았다. 팔기를 간청하는 구매자들의 호소를 야멸차게 거절할 수 있었던 데는 재테크에 대한 고려뿐 아니라 젊은 날 연인과의 추억이 얽혀있다든지, 스스로 걸작이라고 생각해서, 또는 부적처럼 가까이 두고 싶어서 등 이유도 다양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시장에는 피카소의 뒤를 잇는 컬렉터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미술품 투자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시장이다. 국내 미술품 투자는 2000년대 들어 서울옥션 등 미술품 경매시장이 문을 열면서 본격화되었다.미술 투자에 성공한 투자자들의 이야기가 시장에 회자되면서 미술품 시장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투자처’로 인식되었다. 천안 아라리오 미술관 김창일 관장은 한때 가장 많이 회자된 성공담의 주인공이었다. 현대미술에 깊은 조예를 가진 그는 2001년 영국출신 마크 퀸의 설치작품 ‘셀프’를 비롯 yBa (Young British Artists·영국 젊은 작가들)의 대표주자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찬가’와 ‘채리티’ 등 3점에 투자해 120억 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미술품 투자는 방송가에도 적잖은 바람을 몰고 왔다. 직간접적으로 예술계와 관계가 깊은 방송가에는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적지 않다. <사랑방 중계>로 유명한 원종배 전 아나운서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강남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최근 말하기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유정아 전 아나운서 부부도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 적지 않은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들의 크고 작은 투자 성공담이 조금씩 알려지며 방송가에도 미술품 투자 바람이 일기도 했다.다양한 분야에서 시작된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은 2007년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미술 경매시장은 한해 거래량만 5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산 증인인 K-옥션 김순응 대표는 이 시기를 미술시장의 중흥기로 기억한다. “2001년 미술품 경매시장에 첫발을 디뎠을 때 시장 규모가 고작 40~50억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7년에는 500억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2006년~2008년 초 사이 그림값이 크게 올랐습니다.”그러나 단기간의 급등은 미술품 가격에 대한 거품 논란을 야기했고, 이를 기점으로 미술품 가격은 하락을 면치 못했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촉발된 경기하락이 미술품 시장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겸 한국아트밸류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2009년 상반기 그림시장 현황’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만 그림 가격이 39%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 미술시장지수를 100으로 봤을 때 2007년이 최고점으로 638.88을 기록했다. 이후 2008년 481.58, 2009년 상반기에는 325.54로 하락세를 이어갔다.희망적인 사실은 최근 하락세가 둔화됐다는 점이다. 경기가 살아나면서 미술품 시장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것.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미술품 시장은 주식, 부동산 시장과 동조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은 이미 어느 정도 가격을 회복한 상태이다. 따라서 조만간 미술시장도 좋아질 거라는 게 미술계 안팎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문제는 회복의 시기이다.회복의 기미는 미술 시장 주변에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관계자들의 우려 속에 지난 9월 17일 개막한 제8회 KIAF2009(한국국제아트페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KIAF2009는 2008년에 비해 작품 거래량이 4억 원가량 줄어든 136억 원, 방문객도 전년에 비해 5000여 명이 줄어 5만6000여 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앞서 열린 상하이 SH Contemporary, 대만 Art Taipei의 작품 거래량이 전년에 비해 ‘반 토막’이었던 상황에 비추어보면 고무적인 결과다.KIAF 사무국 정득순 대리는 “참가 화랑의 질적 향상, 이것은 무엇보다 이번 KIAF를 마무리하면서 느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며, “참가화랑은 줄었지만 작가층이 넓어져서 고객의 선택폭도 넓어졌다”고 평가했다.미술품 거래의 주요 축인 경매시장도 살아나고 있다. 지난 9월 열린 K-옥션의 2009년 세 번째 메이저 경매는 낙찰률 73%라는 좋은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총 226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경매에는 164점이 낙찰됐다. 총 낙찰 금액은 71억3000만 원. 가장 높은 낙찰률을 보인 부문은 해외 미술로 76%의 낙찰률을 보였고, 이어서 근현대 미술이 72%의 낙찰률을 나타냈다.문제는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미술 시장을 이끌 것인가’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 또한 K옥션의 최근 경매와 KIAF2009의 결과에서 찾아야 한다.K옥션의 이번 경매에서 최고가 낙찰작은 천경자의 ‘초원II’로 12억 원에 팔렸다. ‘초원II’는 2007년 5월 K옥션에서 12억 원에 낙찰된 작품으로, 이번 경매에서 역시 같은 가격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시장과 작품가격에 대한 동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세일 작품이어서 경매 전부터 미술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다.이번 경매에서는 국내 블루칩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등의 수작이 대거 낙찰돼 미술시장 활성화의 분수령이 됐다. 김환기의 작품은 ‘새와 달’ 외 3점이 출품돼 응찰이 거듭된 가운데 4점 모두 낙찰됐다. 그 중 ‘새와 달’은 6억8000만 원에서 출발해 9억 원에 낙찰됐다. 장욱진의 ‘소녀와 새’는 3억2000만 원에 낙찰됐다. 이는 작품성과 희소성이 뛰어난 작품에 대한 수요는 경제상황과 무관함을 보여준다.K옥션 김 대표는 “이번 경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미술시장이 불황을 거치면서 컬렉터들의 안목이 한층 높아져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라며 “경제위기를 겪은 후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 우량자산 선호현상인데 미술 시장에도 이 같은 경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이런 경향은 KIAF2009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KIAF사무국 정 대리는 “KIAF2009를 통해 고객들의 작품을 보는 시각과 경향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컬렉터들은 작품을 고를 때 주변의 평이나 소문에 의지하지 않고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작품을 구입하는 특성을 보였다. 소위 잘 나가는 작가의 '묻지마' 식 투자는 예년에 비해 줄어든 반면, 본인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었다.따라서 향후 미술 시장은 기존의 블루칩 작가와 최근 인기를 끄는 신진 작가들이 양분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취향에 따라 한 가지 경향을 가질 필요는 없다. 투자는 항상 불확실하다. 투자에 따르는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장치가 안전한 포트폴리오 구성이다. 미술품 시장도 마찬가지다. 작가를 블루칩, 옐로칩, 레드칩 등으로 나누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미술품 투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품을 보는 심미안을 키우는 것이다. 사실 미술품은 투자대상으로 몇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첫째,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비해 환금성이 굉장히 떨어진다. 부동산보다도 환금성이 떨어지는 게 미술 작품이다. 미술 작품을 처분할 창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특히 현금화가 어렵다.둘째, 거래 비용이 무척 많이 든다. 주식 거래에 드는 수수료나 부동산 중개수수료는 부담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미술 작품에 거래 비용이 무척 많이 든다. 수수료가 적은 경매를 이용하더라도 총 거래액의 10%를 거래 비용으로 내야 한다. 소더비 등 외국의 경우에는 수수료가 20%이다. 보유기간의 금융비용을 생각하면 작품 가격이 최소 2배는 올라야 수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마지막으로 미술은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공부하기가 까다롭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관련 서적도 많고, 공부에 품이 덜 든다. 그러나 미술 공부는 왕도가 없다. 책을 보고 틈나는 대로 갤러리를 찾아 자주 작품을 접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이런 모든 단점을 감내하면서까지 미술 작품에 투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그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는 미술 투자에 성공하기가 어렵다. 특히 요즘 컬렉터들은 점점 작품의 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미술 시장의 트렌드는 한 마디로 ‘Flight to Quality’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미술에 대한 안목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미술작품에 투자하고 싶다면 당장 미술 공부를 시작하십시오. 미술품 투자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안목의 문제입니다. 안목만 키운다면 적은 자금으로도 충분히 투자가 가능한 곳이 미술시장입니다. 미술시장의 전망도 그만큼 밝고요. 인류 전체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한 미술시장은 성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경매업체 관계자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