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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좀 줄어드는 추세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어음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다. 그런데 어음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좀 묘한 데가 있다. 어음이란 일정한 금액을 일정한 기간 내에 지불하겠다는 약속의 증표인데, 애초에 돈을 떼어먹을 심산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뭘까? 이자가 있지만 어차피 누구나 어음을 사용한다면 이자로 득을 볼 수 없다. 현금으로만 복잡한 현대 사회의 경제를 지탱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일종의 유가증권도 필요하겠지만, 지불 과정이 약속대로만 진행된다면 원칙적으로는 어음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실한 기업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도 어음을 받지만 않는다면 어음으로 지불하지 않죠.”실현 불가능하겠지만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만약 전 사회가 한날한시에 어음 대신 현금 지불을 약속하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어떨까? 중간에 사기꾼만 없다면 문제될 게 없다. 마지막으로 발행한 어음이 결제될 때까지만 모두가 참아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전 사회가 동시에 약속하고 실천한다면 크게 개선될 수 있는 것은 어음 말고도 교육이 있다. 예전에는 대학이 출세를 위한 밑거름이었다. 신분제 사회를 벗어나 갓 태어난 근대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하려면 뭐니뭐니해도 ‘가방끈을 길게’ 만드는 게 최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만 대학에 진학할 경우에 가능하다. 모두가 대학을 간다면 대학 졸업장은 특별한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 모두들 대학에 가려 애쓰는 이유는 남들도 다 가기 때문이다. 즉 예전에는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대학에 갔지만, 요즘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간다.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크게 다르다.다시 한 번 불가능한 상상을 해보자. 만약 우리 사회의 모든 학부모가 한날한시에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어떨까? 모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인 고학력 인플레이션이나 지나친 사교육비 부담도 사라질 것이다(물론 공부를 워낙 잘한다거나, 장차 학자가 될 자질과 꿈을 갖춘 학생은 당연히 대학에 가야 하므로 논외다). 이것이 어음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는 이유는 성실한 학부모들도 성실한 기업인들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과외를 안 시킨다면 나도 내 자식에게 과외를 시킬 필요가 없죠.”사실 우리 사회의 과열된 교육열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있다. 중앙집권적인 왕조 체제를 수천 년간 지속해온 데다 특히 조선시대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학자-관료’라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지배 엘리트 구조를 가진 탓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잘해야 출세한다는 의식이 예부터 팽배했다. 게다가 시민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는 자고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최고로 쳤다. 나랏일을 한다는 명예뿐 아니라 직업적 안정성도 가장 높다. 옛날엔 과거요 오늘날엔 고시다. 그게 안 되면 공무원이라도 되어야 한다.그런데 신분제 사회에나 어울리는 이 전근대적인 의식은 놀랍게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도 일맥상통한다. 현대 사회에서 학력은 일종의 ‘자본’처럼 세습되고 상속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노점상을 한 명 인터뷰했다. “물론 먹고 살 대책이 없죠. 하지만 지금 가장 급한 건 큰 아들 놈 대학 입학금이에요.” 그러고 보니 입시철이다. 방송사에서는 그들을 두고 ‘생계를 위한 노점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다음에는 어느 중년 여성이 운영하는 노점상을 취재했다. “남편이 직장은 잃지 않았지만 월급이 줄어 애들 학원도 못 보내요. 학비라도 벌려고 나왔지요.” 이것도 ‘생계를 위한 노점상’이었다.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그 얘기에 동조한다. 적어도 학부모라면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자식을 대학 보내는 일이 생계라니?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장학금은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에게 주로 배당된다. 특히 학교 외에서 제공되는 장학금, 이를테면 냉면집을 운영해 평생 모은 10억 원을 대학교에 기탁하는 장학금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게 뭐 이상하냐고? 초등학교라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고등교육기관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지원하는 게 정상이다. 굳이 형편을 따진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에서 가난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는 게 원칙이다.우리나라에서는 교육에 관한 한 사회적으로 넓은 관용의 폭이 주어진다. 단적인 예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동정표를 많이 받는다. “배우려는 게 무슨 죄야?” 하긴, 유흥비로 탕진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등록금과 유흥비는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걸까?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일이 ‘생계’가 되고, 배우려는 게 죄가 되지 않는 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이다. 이런 풍조에서 고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은 국가의 발전이나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배워 출세하라는 격려금이나 다를 바 없다. 신문기사에는 ‘차디찬 세파 속의 따뜻한 인정’이라는 제목 아래 미담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타산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사회 교육과 학력의 관념은 오히려 프랑스의 철학자 부르디외가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는 학력을 하나의 자본으로 보기 때문이다.고전적인 계급의 개념은 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계급은 생산수단이나 자본의 소유 여부에 따라 구분되었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아비튀스(habitus)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계급을 설명한다. 아비튀스란 인간 행위를 생산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예를 들어보자. 대학교수인 김 씨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좋아하고, 전철역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박 씨는 하루종일 이미자의 흘러간 옛노래만을 틀어놓는다. 트로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례의 말이 되겠지만, 통념상으로 보면 바흐의 음악은 이미자의 음악보다 고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김 교수가 저명한 연극연출가인 아버지와 음악대학 기악과 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면, 고급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집안에서 그런 문화적 여건과 그런 교육을 받았다면 김 교수의 그 음악적 취향은 고급, 저급을 논하기 이전에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튀스란 의식적인 취향의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다. 흔히 자신이 선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취미란 실은 이처럼 무의식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아비튀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아비튀스는 복잡한 교육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고전음악에 묻혀 살았을 테고, 무의식적으로 그 취향에 대한 아비튀스를 키워왔을 터이다. 반면 박 씨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자칭 ‘공돌이’ 타칭 산업 역군으로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던 짬짬이 라디오에서 흘러간 가요를 들으며 역시 무의식적으로 나름대로의 아비튀스를 키워왔을 터이다. 이처럼 아비튀스는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그래서 부르디외는 교육을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른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지배하지만 예전처럼 경제적 자본만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경제적 자본의 지배보다 문화적 자본의 지배가 강화된다. 두 자본은 서로 결합하여 지배하기도 한다. 경제적 자본을 가진 자본가(기업가)는 문화적 자본을 더 추구하며, 문화적 자본을 가진 ‘자본가’(교수, 판사 등)는 경제적 자본을 더 추구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류층의 ‘혼맥’은 여기서 비롯된다.경제적 자본만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도 상속된다. 경제적 자본의 상속은 우리 사회가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을 어느 정도 버리게 된 최근에 들어서야 재벌 경제의 문제점으로 인해 공공연히 드러났지만, 문화적 자본의 상속은 부르디외가 주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알려져 있었다. 바로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일이 ‘생계’가 되는 현상, 배우려는 게 죄가 되지 않는 현상을 통해.예전에는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대학에 갔지만, 요즘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간다.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크게 다르다.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