葛飾北齋 가츠시카 호쿠사이
본 동경의 관문 나리타(成田)국제공항에 들어서면 공항 안내문이 있다. 이 안내문 표지는 우키요에(浮世繪)풍의 현대적 다색목판화로 비행기가 멋지게 이륙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우키요에는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 후기에 유행한 서민용 다색 목판화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우키요에 그림을 에도의 길거리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키요에는 가장 일본다운 그림이자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우키요에는 또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이르는 자포니즘(Japonisme)의 열기를 만들어낸 원천이기도 하다. 고흐가 우키요에 판화를 유화로 묘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젊은 날의 피카소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가부끼(歌舞伎) 배우의 초상 목판화 위에 친구 얼굴을 그린 작품을 남겼다.‘우키요에(浮世繪)’는 18,19세기 에도의 판화나 또는 그와 같은 경향으로 제작된 회화 작품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덧없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의미인 이 용어는 작가 아사이 료이(淺井了意)에 의하여 1661년에 처음 사용 되었는데, 그는 우수에 젖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무상함을 낭만적으로 해석하여 불교적인 개념으로 차용하였다. 한정된 시간과 가장 사소한 일상사에 대한 집착을 인식함으로써 화가들은 그때까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들 자신의 생활모습을 직접 표현하게 되었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초기에 불교의 경전이나 신상(神像)등을 제작하였으나 점차 <겐지모노가다리(源氏物語)>같은 문학작품과 여인들의 일상생활과 유녀(遊女)들의 에로틱한 장면, 그리고 가부키의 배우들을 묘사하고 나아가 순수 자연의 풍경을 그려내었다.가부키는 에도시대 서민의 예능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약 4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부키라는 말은 원래 가타무쿠(傾く, 바람나다, 好色하다 등의 뜻)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이다. 근세 초기 고료에(御靈會)라는 종교행사와 함께 후류오도리(風流踊)라고 부르는 예능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라는 여자가 교토(京都)에서 가무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여자 가부키’는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나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는 1629년 풍기상의 이유를 들어 여자의 출연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동(美童)·미남자 등이 주로 춤과 곡예 등을 보이는 가부키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남색(男色)을 파는 일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1652년 미동의 출연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에도에 있던 극단들은 바쿠후 당국에 진정을 계속하여 결국 미동의 상징인 앞머리를 자르고, 가무(歌舞)는 하지 않고 연극만 하는 조건으로 다시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본격적인 대사와 함께 여장(女裝)한 남자가 깊이 있는 연극을 보여주게 되었고, 가부키는 여러 형태로 변모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노(能)가 600년 전 완성된 일본 귀족과 무사계급의 예능이었다면, 가부키는 대중 속에서 대중의 지지 아래 뿌리를 내린 대중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자는 대중들의 절대적 인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 직업은 세전(世傳) 또는 가전(家傳)으로 이어지는 권위 있는 직업이 되었다. 무대나 관객, 좌석, 그리고 특히 전설 속의 영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이 연극은 우키요에 화가들에게는 영감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우키요에에 영감을 준 또 다른 큰 흐름은 에도의 유곽인 요시와라(吉原)의 세계였다. 에도의 수미다 강보다 낮은 쪽에 위치한 늪지에 대나무가 무성한 거리라고 해서 ‘초록색 창가(娼家)’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지역은 미녀들과 지식인들의 모든 오락생활의 유배지였다. 이 제한된 구역에서 고참 유녀를 일컫는 오이랑(花魁)과 그들의 어린 문하인들인 마이코(舞子), 이들이 자라나서 되는 게이샤(藝子) 그리고 시중드는 여인들이 함께 살았다. 그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유명한 배우 화가 작가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도 있었다.호쿠사이는 그림에 미친 천재 또는 화광(畵狂)으로 일본미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후지산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가운데 <가나가와의 파도(神奈川沖浪裏)>는 서양을 사로잡고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교향곡 <바다>를 작곡하게 한 그림이다. 지난 2000년, 새로운 천년을 기약하며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천 년간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을 발표했다. 거의 서양인들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중에 86번째 인물로 호쿠사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대단한 영광이었다.호쿠사이는 90년의 생애 가운데 30회 이상 자기의 이름을 바꾸었고, 백번 이상의 이사를 하였으며, 항상 새로운 예술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는 기행(奇行)과 기벽(奇癖)의 성격을 지녔었다. 평생 천여 장에 달하는 판화를 제작한 호쿠사이는 모든 판화 도안가 중에서 가장 작품을 많이 만든 판화가였으며, 재능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오랜 판화 경력을 통해 소설의 삽화를 그려주었고, 직인들을 위한 도안 지침서와 아마추어 미술가들을 위한 지침서를 제작하기도 하였다.호쿠사이는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이 데지마(出島) 섬의 맞은편 도시인 나가사키(長崎)에서 가르쳐 주었던 서양학문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섬은 1638년 일본의 쇄국선언 이후 유럽인들로는 유일하게 잔류가 허용된 네덜란드인들의 거류지였다. 네덜란드인들은 그곳에서 서양문물의 대사 역할을 했다. 그들은 유럽의 고전주의 회화와 이탈리아 회화의 복제 판화들을 퍼트렸다. 이탈리아 복제 판화에 나타난 투시법은 중국 문인화의 전형인 산수화적인 세계관에 변혁을 가져 왔다. 네덜란드인은 또한 일본인들에게 식물학 해부학 등을 전해주었다. 호쿠사이는 나가사키를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원근투시법, 해부학, 식물학은 그의 새로운 회화장르인 ‘만가(漫畵)’의 한 대목들을 새롭게 장식하게 된다. 그 가운데 <호쿠사이 만가(北齋慢畵)>15권은 ‘그림에 미친 늙은이’가 죽은 뒤에는 볼 수 없는 세상 만물에 대해 느끼는 향수가 곳곳에 어린 작품이다. 생생하면서도 뛰어난 기교로 묘사된 숱한 장면들이 일종의 백화사전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식물과 동물, 다리, 격투기, 곡예사, 어린이들의 놀이 등 온갖 방면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호기심을 잘 보여주는 수천 장의 스케치들이 함께 실려 있다. 이처럼 서양에 매료되었던 그였지만 선불교에 대한 깊은 애착과 또 ’덧없는 세상‘ 즉 부세(浮世)의 만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호쿠사이가 나이 예순일곱 부터 그리기 시작한 <후지산삼십육경>은 그의 대표작일 뿐 만 아니라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후지산은 일본 혼슈(本州)지방의 시즈오카현(靜岡縣) 북동부와 야마나시현(山梨縣) 남부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3776m의 일본 최고봉으로, 후지 화산대의 주봉이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원뿔형의 성층화산이다. 후지산은 일본 중심에 자리하여 바다에서든 내륙이든 간에 멀리 눈 덮인 풍경은 그야말로 신성 그 자체이다. 일본 국기의 붉은 해가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한 봉우리로 마무리된 후지산의 신비와 맥을 같이한다. 호쿠사이는 <후지산삼십육경>에 자기가 배웠던 모든 화법을 독자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발한 구도, 간결하고도 선명한 채색법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적인 자연과 동적인 인간, 원근법과 과장법으로 예상을 뒤엎는 콘트라스트 등 호쿠사이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호쿠사이의 <후지산삼십육경>가운데 후지산의 <아침풍경(凱風快晴圖)>은 1831년 그의 나이 일흔하나에 제작한 것으로 후지산의 여름부터 가을에 접어드는 아침 풍경을 그린 것이다. 아침에 뜨는 붉은 해가 후지산을 붉게 물 드린 풍경은 단순성과 명료함이 돋보이는 가장 일본다운 명작이다. 호쿠사이의 이 작품은 훗날 세잔의 <생빅트와르 산>그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세잔이 189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06년 사이, 그는 집중적으로 액상프로방스의 생 빅트와르 산 그림을 그려 수십 여 점 남겼다. 세잔이 나름 호쿠사이의 후지산 풍경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불현듯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프랑스 화단과 문화계는 온통 일본풍이 만연했기 때문이다.호쿠사이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가나가와의 파도>를 들 수 있다. <가나가와의 파도>에서의 후지산이 멀리보이는 바다의 거대한 물결이 작은 배를 향하여 할퀼 듯 덤벼드는 모습과 같은 스릴 넘치는 묘사를 보면 호쿠사이가 얼마나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낸 천재화가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이 두 장의 그림이 섬나라 일본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웅변한다. 대가의 무수한 작품 가운데 단 몇 점으로 그를 대변하니 불후의 명작은 이렇게 탄생하나 보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대량 복제 판화가 미국 문화의 중심에 서듯, 호쿠사이의 <후지산삼십육경>은 오늘의 일본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글·사진 최선호(화가)©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