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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많이 줄었으나 한 세대 전만 해도 전기료, 수도료 같은 ‘이용료’를 전기세, 수도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이 가진 자원을 이용한 대가로 지불하는 돈이 이용료라면 전기와 수도를 이용한 대가는 당연히 요금, 즉 이용료가 옳다. 그런데 왜 예전에는 그것을 ‘세금’의 하나인 것처럼 여겼을까? 여기에는 중대한 역사가 숨어 있다.공화국 시대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 의식에는 왕조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왕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왕, 즉 국가가 모든 것의 오너이며, 국민은 관이 다스리는 피지배 신분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국가에 내는 세금은 당연한 의무다. 쉽게 말해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는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으므로 세금은 절대적인 의무였을 뿐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국의 개념이 일찍부터 발달한 서양의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납세가 중요한 의무이자 권리였다.‘대표 없이 과세 없다.’ 18세기 미국 독립혁명의 이념이 집약된 슬로건이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치적 권리는 주지 않으면서도 세금은 온갖 항목을 붙여 가혹하게 징수하던 폐해를 비난하는 뜻을 담고 있다. 직접세보다 간접세의 비중이 높아진 오늘날에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의 초기 정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다.세금을 부과하려면 먼저 정치적 대표를 인정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납세는 의무만이 아니라 권리이기도 하다는 관념이 나온다. 공화국의 국민은 세금을 국가에 내야 하지만 그에 따르는 혜택을 받을 권리도 가진다. 독립하기 이전의 미국은 식민지 상태였으므로 무엇보다 본국인 영국에게서 식민지 대표를 인정받는 게 시급했다. 현대 국가에서는 그보다 국민의 권리가 훨씬 다양하다. 군대나 경찰력, 행정력의 유지,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빈민이나 장애인 등에 대한 복지 등등이 모두 납세에 상응하는 혜택이다.하지만 자체적으로 공화정을 발달시킨 역사를 가지지 못한 동양 사회의 일반 국민들은 납세를 권리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부재하다. 그 역사적 부재가 지금의 일상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측면은 ‘전기세’와 ‘수도세’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파출소나 주민센터는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공공건물이므로 그 안의 화장실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막상 볼일이 급할 때 그런 곳으로 선뜻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공서는 아무래도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동양 사회에 익숙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관공서에서 하는 공무는 국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일이라기보다 국민을 ‘관리’하는 일이다. 관리(官吏)가 아니라 관리(管理)인 셈이다. 이런 견해는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경제 행위에 관한 각종 법령이나 조치의 본래 취지는 국민들의 경제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한 데 있지만, 공무원들은 그것들을 국민들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한다.이런 견해의 근거는 바로 국가 자체가 왕의 소유라는 점이다. 동양식 왕조는 나라 안의 모든 땅이 군주의 소유라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을 왕토사상(王土思想)이라고 말하는데,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시경(詩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사상이다. <시경>은 춘추시대에 공자가 옛 시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니까 왕토사상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시대 초기까지 거슬러가는 셈이다.왕토사상에 따르면 토지만이 아니라 백성들과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도 명분상으로는 왕의 것이다. 천자는 천하를 소유하고 왕은 왕국의 단독 오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유보가 있다. 현실적으로 왕이 나라 안의 모든 자기 재산을 직접 관리할 수는 없다. 모든 농토의 공식적(아울러 상징적) 임자는 왕이지만 사실상의 임자는 그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다. 여기서 토지소유의 이중성이 생겨난다. 소유자와 경작자의 이중적 토지소유는 왕조시대의 모든 토지제도를 왜곡시켰다.고려의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은 바로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제도였고, 또 그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제도였다. 전시과와 과전법은 일단 관리의 급료제도이지만 왕조시대에는 토지제도와 세금제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화폐경제가 부재했던 시대에 관리의 급료는 당연히 돈이 아니라 토지로 지급했다. 그런데 토지 소유자는 왕이므로 관리들에게 토지 자체를 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정부는 임용한 관리에게 녹봉으로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내주는 게 아니라 조세를 수취할 권리(수조권)만을 내준다.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근대적 토지제도가 성립할 수 없다. 게다가 법과 제도의 측면과 관행적 측면이 공존하므로 이 틈에서 부패와 비리가 싹튼다. 예를 들어 왕토사상에 따르면 토지의 매매가 불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매가 이루어진다. 관리들은 이런 모호함을 악용해 사안에 따라 토지의 매매를 허용하거나 불허하는 농간을 부려 농민을 갈취할 수 있게 된다. 고려와 조선 중기부터 진행되는 황폐한 토지 겸병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나아가 한반도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예외 없이 건국 후 50년이 지나면 경제 구조가 붕괴하면서 쇠퇴일로를 걷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중국에서는 명대 후기에 자영농과 신흥 지주들이 성장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토지소유 관계가 성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왕토사상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점은 당시에 시행된 일전양주제(一田兩主制)라는 명칭에서 드러난다. 일전양주라면 하나의 토지에 주인이 둘이라는 뜻이다. 한 명은 경작자이고 다른 한 명은 소유자를 가리킨다(소유자는 천자의 소유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토지의 소유권은 그대로 두고 경작권을 공식화한 것이다. 일전양주제에 따라 경작자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경작권을 매매할 수 있었고 저당도 잡힐 수 있었다. 경작권도 소유권에 못지않은 권리라고 규정하게 된 것은 분명한 진일보지만 왕토사상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왕토사상이 근절되려면 지주가 (왕의 소유권을 위임받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토지의 완전하고 유일한 소유자라는 관념이 성립해야 한다. 일전양주제에서는 소유권을 ‘땅 밑의 권리(田底權)’, 경작권을 ‘땅 위의 권리(地面權)’라고 불렀으므로 여전히 소유권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왕토사상이라는 근원적인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 사회에서 세금은 언제나 의무일 뿐 권리가 되지 못했다. 위정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세금을 납부하는 백성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나랏님’의 땅을 갈아먹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조세를 내야 하는 것이지 거기에 감히 권리 따위를 내세울 마음은 먹지 못했다. 간혹 흉년을 맞아 조세의 징수가 연기되거나 액수가 적어지면 나랏님이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베푸는 시혜라고 고마워할 따름이었다.세금이 권리가 아닌 의무일 뿐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세금은 곧 ‘버리는 돈’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라면 누구나 세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기업이 절세를 넘어 탈세를 꾀하고, 재벌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증여하는 것 역시 잘못된 세금 개념 때문이다.남경태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