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부활한 로마의 전통

로크로 대표되는 17세기는 열정의 시대이자 변화의 시대였다. 1611년 존 던(John Donne)은 ‘현세(現世)의 해부’를 발표해 전통적인 질서가 붕괴되어가는 당대의 세태를 읊었다. “새 학문은 모든 것을 회의의 심연으로 던지고 화기(火氣)의 요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태양이 상실되고 지구가 상실되어 인간의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계에는 싫증을 느꼈다고 염치없이 말하며 행성으로, 허공으로 실로 많은 것을 찾으러 간다.”르네상스를 경험한 유럽은 전통과 질서의 붕괴에 의해 풀려나온 힘의 충동으로 완전히 피폐해 지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지배하는 즈음에 낡은 질서의 파괴로 인한 당황스러움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갖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음을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혼란스러움에서 과학, 철학의 새로운 사상에 의해 전통적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조가 사라졌고, 종교개혁으로 인한 소용돌이는 여전히 유럽 내의 갈등을 야기했다.밀턴, 뉴턴, 갈릴레이, 크롬웰, 루이14세, 바흐, 헨델, 베르니니,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몰리에르, 루벤스, 베르메르 등이 이 시기의 주역들이다. 방법서설을 발표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낳았다. 철학이 기하학이라는 명제를 던져주고 그것은 베르사이유 건축을 이루어냈다.절대왕정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작은 나라들이 웅거하는 이탈리아 그리고 입헌군주의 영국이 신성로마제국과 엉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스페인의 왕이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되어 프랑스와 자웅을 겨루다가 불똥이 로마로 튀면서 독일 용병을 동원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까지 터졌다. 이 사변으로 로마는 완전히 짓이겨지고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이로 인해 가톨릭 본산인 로마의 바티칸은 한창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프로테스탄티즘과의 대결에서 밀리는 듯 했다. 그러나 로마는 살아남았으며 전통의 굳건한 바탕에서 로마 재건의 기치를 들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일세기 쯤 후에 짓다만 성베드로 성당 건축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베르니니가 등장해 바로크의 기운을 뿜어낸다. 조각과 건축 전반에서 천재성을 보여준 베르니니는 폐허를 딛고 성장한 로마를 존재하게 만든 위인이다. “베르니니가 끌을 대면 돌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라는 찬사처럼 그의 조각들은 불멸의 작품으로 로마를 오늘과 같은 멋진 도시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그의 작풍은 유럽 전체 곳곳으로 스며든다. 조각은 말할 것도 없고 가구 건축 등도 마찬가지다.그는 초기에는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후원을 받아 실물 크기의 중요한 군상들을 만들었다. 이 연작들은 단편적이고 우연한 시각으로 된 ‘트로이에서 달아나는 아이네아스와 안키세스 및 아스카니오스 (Aeneas, Anchises and Ascanius Fleeing Troy)’에서부터 마치 부조처럼 한 곳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아폴론과 다프네(Apollo and Daphne)’의 환상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를 놀라게 하는 작품들에 나타난 실제 피부와 같은 질감,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각과 새로운 색채감각은 미켈란젤로의 전통에서 벗어나 조각의 역사에 전기를 부여했다. 그가 빚어낸 조각들은 스냅사진을 보는 듯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한 역동적 숨결이 담겨 있는 것이다.성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한 건축물이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으며 로마에 있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의 키지 성당을 위해 조각한 ‘사자굴 속의 다니엘(Daniel in the Lion's Den)’은 굶주린 사자가 순한 양처럼 부드럽게 다니엘을 혀로 핥고 있는 구약의 장면을 표현했다.베르니니의 성숙한 예술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성녀 테레사의 법열(The Ecstasy of St. Teresa)’이 있다. 천사가 나타나 신성한 사랑의 불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는 테레사의 환영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성녀는 물결 모양의 옷 주름에 휩싸인 채 무아(無我) 상태에서 황홀경에 빠진 모습으로 표현돼 아름다운 빛에 싸여 제단 너머의 벽감(壁龕) 안에 들어 있다. 그 좌우에는 오페라 좌석과 비슷한 공간 속에 대리석상으로 묘사된 코르나로가(家)의 수많은 가족들이 대화나 독서 또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종교적 드라마에서의 예배자도 포함해 조각과 그림, 빛 등으로 이루어진 회화적인 장면이다.로마의 여행자들은 미켈란젤로를 만나거나 판테옹이나 바티칸을 관람한다.하지만 건물에 가려 있긴 해도 진정 로마를 빛낸 예술은 베르니니의 바로크일지도 모른다. 그가 이룬 시대의 유산은 오늘까지도 빛으로 황홀하다. 이탈리아의 분수와 건축, 실내장식, 조각, 회화 등에 남긴 바로크 유산은 멕시코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까지 확산된다.좀 특별한 경우는 프랑스다. 루이14세는 마차를 보내 베르니니를 정중하게 초대했지만 수개월 머무른 후 베르니니는 오직 루이14세의 흉상 조각 한 개만을 남기고 베르사이유를 떠난다. 루이14세와 그의 건축가들과 베르니니는 생각이 달랐다. 이는 프랑스가 스스로의 자존을 확신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즉 지금까지 이탈리아를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예술 행위로만 알았지만 이 시점부터 자존을 확립하고 데카르트가 주창한 기하학에 기초한 균제와 좌우 대칭을 중시하는 ‘루이14세 양식’을 로마의 바로크와 대비하였다. 알프스를 넘으면서 로마의 바로크는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유명한 회화들은 로마의 조각 이상의 역동성을 빛으로 표현하면서 바로크 예술의 일원임을 증언하고 있다.그러나 음악은 어떨까? 많은 이들이 바로크 음악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사실 바로크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그 17세기의 음악을 표현해 내기에는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가톨릭을 빛낸 음악이 시대상을 담은 것이라는 뜻에서는 바로크적이라고 할 수 있을 터.유럽에서는 당시 시누아즈리라 불리는 중국 열풍이 있었으며 그 때 독일에서는 백색자기 마이센이 탄생한다. 바로크의 특징적인 조각을 만들기도 하고 도자기에서도 바로크 특유의 움직이는 듯한 요소들이 디자인에 스며있어 흥미롭다. 마이센은 캔들러라는 조각가가 공장장으로 부임하면서 바로크 조각을 빚어낸다. 이로써 그릇에 머물렀던 자기를 또 다른 예술장르에 편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마이센 조각들은 오늘날 바로크 자기로 분류되어 경매에서 앤티크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는다.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