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Cezanne

시는 문화다. 엑상프로방스는 온통 세잔(1839~1906)이다. 세잔이 곧 엑상프로방스다. 엑상프로방스, 줄여서 엑스의 떼제베 기차역 문을 나서면서부터 세잔의 초상으로 가득하더니 시내도 역시 세잔으로 가득하다. 가로수 관공서 음악당 미술관 기념품 가게 할 것 없이 세잔이니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이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화가 좋기는 좋다. ‘세잔의 길’을 따라 그의 삶을 느끼고, 그가 그린 생 빅트와르 산을 바라보며, 그의 화실에서 그의 체취를 더듬고, 나아가 엑스 근교 비베뮤스의 채석장에서 세잔이 그린 곳을 따라가면서 화가의 눈과 시각을 확인하는 여행은 실로 행복하다. 엑스에 세잔을 찾는 관광객이 몰리자 베를린 필은 매년 7,8월 이곳에서 연주회를 갖는다.여름, 지중해의 태양과 거친 미스트랄 바람이 몰아치는 엑스는 베를린 필의 연주와 세잔의 그림이 어우러져 유럽문화의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어 간다. 중세풍의 한적한 도시 엑스의 상징처럼 버티고 서 있는 생 빅트와르 산이 프로방스의 뜨거운 여름을 달군다.프로방스를 여행하면 누구나 강렬한 색채가 창출해 내는 빛의 현상을 경험할 것이다. 밝은 프로방스의 태양과 푸른 하늘, 한낮에만 안개가 끼는 맑은 대기는 풍경을 거의 비실재적인 색채 속에 담근다. 그 빛은 대상에서 색채의 극대화를 야기한다. 사물의 내부에는 타오르는 빛깔이 있는 듯 보인다. 심지어 돌로 덮인 평범한 언덕, 자갈길 혹은 바위도 주변의 초목과 하늘의 색채를 빨아들이고 그것들로 빛을 발산한다. 이곳이 프로방스다.프로방스는 예술가에게 선택된 곳이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줄곧 고향의 풍광을 화폭에 담은 세잔은 결코 자신과 멀어질 수 없는 이곳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엑스의 모직모자 판매상이자 수출업자로 시작해 은행가로 자수성가한 실용주의적인 사업가였고 아들이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법을 공부해 자신의 가업을 잇기를 원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엑상프로방스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간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결국 1859년 엑스의 데생전문학교에서 그림수업을 시작으로 평생 고독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1861년 친구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에 가게 된 세잔은 에콜 데 보자르에 낙방한 후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엑스로 돌아와 마지못해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했지만, 두 해 전 아버지가 구입한 프로방스 군주의 옛 여름별장이었던 자 드 부팡에 작업실을 만들고 그림에 열중한다. 훗날 아버지가 죽자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 드 부팡을 매각한 후에는 엑스 시내의 조그만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다. 아버지는 세잔이 결코 자신의 은행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자르에서 수학하는 조건으로 두 번째 파리 행을 허락하지만 또 다시 낙방한다. 세잔의 그림은 당시 엄격한 관료주의와 고루함에 젖어있던 보자르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세잔은 당시 보자르에서 행해지는 교수법, 다시 말해서 사진을 찍듯 정확한 시선으로 사물을 포착하는 방식을 끔찍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은 이성의 뒷받침 없이 눈의 지배만을 받는 손재주에 대한 경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의 철학이 부재하고 오직 손끝에서 나오는 재주와 기술에만 의존한 ‘달콤하고 예쁜 그림’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다. 세잔은 그래서 자신이 그린 병들이 삐뚤어져 있거나 접시들이 원근법에 맞지 않아도 무관심한 척 했다.“나는 원통모양의 옆면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세잔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물은 공과 원통모양을 하고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설명하면서 세잔은 사과처럼 공 모양이거나 원통 모양의 볼록한 물건뿐 아니라 벽이나 천장처럼 평평한 물건까지 포함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세잔이 왜 사과가 놓여있는 테이블이나 평지를 그토록 집요하게 굴곡으로 표현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세잔은 전통적인 공간구성과 결별하고 모든 현대 회화에 새로운 길을 열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세잔의 사과’였다.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사과 한 개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쓴 세잔은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사과는 세잔이 아니더라도 전통적으로 화가들의 즐겨 찾는 정물화 소재이다. 세잔에게 사과는 성경 속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으로 이브가 먹은 사과 때문에 시작된 원죄의 이미지나, 뉴턴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하여 과학의 신기원을 이룩한 사건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잔의 사과는 미술사의 혁명이다. 세잔의 어린 시절 친구 에밀 졸라가 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도와주자 졸라는 그 고마움의 표시로 세잔에게 사과 한 개를 건네주었다. 우정으로 시작된 사과와의 인연은 정물의 소재로 이어졌고 결국 피카소와 브라크로 대변되는 입체파의 선도 역할을 하는 새로운 그림을 창조했다. 세잔은 공간에 놓인 사물을 묘사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2차원의 특성에 기반을 두고, 순수하게 예술적인 방식으로 정물에 깊이감을 부여함으로써 정물화를 새롭게 개척했다. 세잔은 사과를 단순히 정물로 그리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사물의 법칙을 적용하여 분석하고 또 분석하여 새롭게 그려내었다. 한마디로 ‘세잔의 사과’가 탄생한 것이다.엑스의 시내를 조금 벗어나 레 로브의 낮은 언덕에 만년 세잔이 작업하던 화실이 있다. 건물 입구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정원은 나무로 울창하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난다. 2층 세잔의 화실은 아직도 그의 그림을 보는 듯 정물과 석고 그리고 이젤과 작업용 사다리가 놓여있다. 나무마루 바닥에 북쪽으로 커다란 유리창을 내어 사철 빛이 일정하게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북쪽으로 창을 내는 방식은 미술관이나 화가의 작업실을 설계하는 데 중요하다. 동향이나 남향 혹은 서향은 계절에 따라 빛이 다르고 하루 동안에도 아침 저녁 빛이 수시로 변하여 일정한 광선을 확보할 수 없다. 더구나 직사광선은 화면과 물감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아틀리에 건축인 셈이다. 세잔은 만년에 대작 <수욕도>를 그리는데 2층 화실에 캔버스를 들이기 위해 북쪽 벽면 창 옆으로 가늘고 길게 창을 뚫었다. 얼핏 보기에는 바람을 들이기 위한 변형된 통풍구 같지만 사실은 캔버스를 세워 올리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화가가 작업실을 지을 때 좋은 본보기다. 작업실 모서리에는 세잔이 작업하며 입었던 물감 묻은 작업복과 생 빅트와르 산을 화폭에 담기 위해 로브 언덕을 오를 때 모자와 화구를 넣고 다닌 가방, 물감 통들이 먼지가 쌓인 채 놓여있다. 세잔의 정물이었던 사과는 매년 새롭게 바꿔 올려놓지만 세잔이 그렸던 해골은 아직도 세 개가 나란히 오래된 프랑스 서랍장 위에 놓여있다. 비록 말은 없지만 저 해골 정물은 세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터이니 마음이 숙연하다.어느 해 런던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에서 세잔의 <큐피드 석고상과 ‘해부학’>을 봤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색이 살아 있다. 석고상 소년의 표정과 동작도 살아 있는 듯 생기가 감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탁자 위로 쏟아져 내릴 듯한 접시 위의 사과와 양파들은 전체적인 화면 구성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고 시각적 불안감이나 오류를 새롭게 경험하게 한다. 세잔의 진면목을 한껏 구사한 명작으로 1895년에 그려진 작품이다.세잔은 오직 그림만을 위해 살았다.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다. 가족과 친구는 그 다음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엑스의 은둔자’로 불리기도 했다. 세잔은 주변세계를 화가의 눈으로 보았다. 대상을 바라보면서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연구했고, 형태와 색채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의 인생은 고통스러운 투쟁이었다. “빛은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묘사해야 하는 것”이라는 게 세잔의 주장이다. 빛의 재현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인물이 인상파의 거두 모네라면 세잔은 빛을 주변의 색과 형태의 관계에서 규정하고 그에 따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색채만으로 원근법을 지배하고자 노력한다”는 그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세잔의 후기작업의 백미인 생 빅트와르 산을 그린 그림들이다. 프로방스에 있는 생 빅트와르 산은 또 다른 산인 방투산과 마찬가지로 프로방스를 떠올릴 때 거의 신화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멀리서 바라보면 빛의 각도에 따라 색채가 바뀌는데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가 마치 대리석처럼 하얗게 빛난다. 니스에서 엑스로 올라오는 고속도로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끼고 거대한 공룡처럼 날카로운 능선을 한 하얀 산이 바로 생 빅트와르 산이다.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프로방스 전원의 풍요로움과 빛나는 생 빅트와르 산을 보면서 거듭 감탄과 감동을 이어갔다. 세잔이 그린 생 빅트와르 산은 똑같은 산이 하나도 없다. 모두 다르다. 색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다. 다만 어느 것을 보아도 생 빅트와르 산을 그린 그림이고, 모두 세잔 그림이다. <생 빅트와르 산>은 <세잔의 사과>와 <수욕도>와 더불어 세잔의 기념비적 그림이다.세잔은 1906년 10월 15일, 생 빅트와르 산을 그리다가 가을 폭우를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10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세잔은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린 셈이다.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글·사진 최선호(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