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의 불’ FATCA

2013년 미국 재무부가 연방관보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포기한 국외 거주자 수가 3000여 명에 달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2008년 미국 국적 포기자 수가 231명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무려 13배가량 증가한 것이다. 이 중 상당수는 재미교포일 가능성이 높다. 올 7월 1일부터 시행되는 FATCA(팻카)로 인해 거액의 미납 세금과 과태료를 피하려는 사람이 늘어난 여파다.
[SPECIAL REPORT] 30만 명 미국발 세금 폭탄…영주권·시민권 포기 속출
“요즘은 고객 상담의 절반 이상이 FA TCA 관련입니다. 일단은 잘 모르기도 하고, 안다고 해도 국내에서는 선례가 없으니까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 하다가 시행이 코앞에 닥치니까 공포감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FATCA(해외금융계좌신고법. Foreign Account Tax Compliance Act)를 취재하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시중은행의 한 PB가 귀띔해 준 분위기다. 도대체, 그 용어도 낯선 FATCA란 무엇이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2010년 3월 18일 버락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부유층의 역외 탈세를 막기 위한 FATCA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미국은 2007년 금융위기 이후 과도한 부채 문제가 불거지며 추가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고민해 왔다. 특히 미 의회는 해외 탈세로 인한 손실이 매년 10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 2013년 미 의회조사국이 작성한 조세피난처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조세피난처 등을 통한 개인과 법인의 탈세로 1년에 최대 약 1600억 달러 정도의 세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미 정부는 스위스 등으로 흘러들어 간 미 부유층의 계좌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UBS와 같은 금융기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2009년 무렵 미국인 정보를 넘겨받아 거액의 세금 추징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이를 전 세계로 확대하고자 한 결과물이 바로 FATCA인 셈이다. 2014년 3월까지 영국, 캐나다, 일본을 비롯한 26개 국가와 FATCA 관련 정부 간 협정을 체결했다. 우리나라 또한 현지시간으로 3월 17일 이에 합의했다. 최근 미 연방재무부는 FATCA를 준수키로 한 나라는 70여 개국, 금융기관은 7만7000여 개가 넘는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일본 등 26개국과 협정 체결
이 법안의 골자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개인뿐 아니라 해외 금융기관에도 미국 납세자들에 대한 해외 금융 자산을 신고하도록 의무를 지운 것이다. 여기서 미국 납세의무자란 미국에 납세의무를 지닌 모든 이들을 뜻한다. 시민권자, 영주권자는 물론 실질거주자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실질거주자에는 유학 중인 학생과 현지에 파견된 국내 기업 직원 등 미국에 일정기간 이상 체류한 이들이 해당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 장기간 유학을 나가 있는 아들의 명의로 가입한 예금이 있을 경우, FATCA의 의무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FATCA는 크게 개인보고 부분과 해외금융기관보고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 납세의무자들은 4월 15일, 미국 소득세를 신고할 때의 서식인 폼(Form) 8939을 통해 해외 금융 자산을 미국 연방국세청(IRS)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이 법안의 핵심은 해외금융기관보고 부분이다. 이 법에 따라 한국 금융기관은 자사의 고객 중 5만 달러를 초과하는 미국 납세의무자의 계좌 정보를 IRS에 보고할 의무를 지닌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미국 법인에 지급하는 금액에 대해 30%의 세율로 원천징수를 하는 제재를 가하도록 돼 있다. 사실상 미국 내 영업이 금지되는 것이다.

FATCA는 외국금융계정보고서(Report of Foreign Bank & Financial Accounts· FBAR)와 맞물리면서 그 위력이 증폭된다. 사실 미국은 FATCA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해 왔는데, FBAR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미국 세법상 납세의무가 있는 자가 단 하루라도 해외 계좌에 1만 달러 이상을 맡겨 둔 경우 미 재무부에 신고하도록 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20만 달러를 초과하는 금융계좌는 최대 잔액의 50%에 상당하는 벌금이 부과된다. 벌금 외에 가산세를 포함한 세금은 별도다.

그러나 이토록 무거운 처벌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오랫동안 실효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계좌 소유주의 자발적인 보고에 의존하는 만큼, 납세의무자가 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한국 정부의 협조가 없이는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범죄에 연류된 계좌 등 극히 제한된 경우에 한해서만 국내 금융계좌 정보를 미국 측에 넘겨 왔다.
[SPECIAL REPORT] 30만 명 미국발 세금 폭탄…영주권·시민권 포기 속출
그런데 FATCA를 통해 금융기관이 개인의 계좌 정보를 IRS에 신고하게 되면, 그동안 신고가 이뤄지지 않았던 개인들의 자산 정보가 드러나게 된다. 만일 개인이 FBAR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밝혀지면 예금액의 절반을 과태료로 지불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린카드’ 반납도 쉽지 않아…혼란 가중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슈퍼리치 중 미국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의 비중이 원래 높은 편이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사업을 진행하거나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낸 경우가 많아 FATCA의 파급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금융권 추산으로는 미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약 13만 명)를 포함해 실질거주자까지 총 30만 명 정도가 이에 해당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방효석 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 변호사는 “자산가들의 혼란도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자신의 금융계좌가 FATCA의 신고 대상인지, 그동안 누락된 신고 자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이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은 ‘누락된 미신고 금액을 양성화하고 미납 세금을 납부’하거나 ‘FATCA의 해외 금융기관 보고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자산가들이 FATCA의 시행을 코앞에 두고, 올해 초부터 5만 달러 이상의 금융 자산을 여러 기관에 쪼개어 배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각 금융기관별로 5만 달러 이상의 계좌만 보고한다는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금과 같은 실물자산이나 수익형 부동산 등에 관심을 두는 경우도 상당하다. 부동산과 실물자산은 FATCA의 보고 대상이 아니다. 또 다른 PB는 “예금을 쪼개고 쪼개다 결국 상당수는 현금 형태로 개인 금고에 쌓아 두는 경우도 꽤 봤다”고 귀띔했다.
[SPECIAL REPORT] 30만 명 미국발 세금 폭탄…영주권·시민권 포기 속출
그 외에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 중에서는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PB는 “요즘 미 대사관에 가면 그린카드(미 영주권)를 반납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며 “그나마도 최근에는 요청이 너무 많아 일 처리가 밀린 데다가 미국에서도 세수 확보를 위해 FATCA의 기준이 되는 6월 30일 이후로 처리를 지연하는 등 비협조적인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현진 법무법인 세종 자산관리팀 변호사는 “미국 국적 포기도 뾰족한 수는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병역 문제 등이 걸려 있는 데다가 국적포기세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적을 포기할 경우 미국 내 자산뿐 아니라 미국 외 지역의 모든 자산을 포함해 국적포기세를 산정하도록 돼 있다. 보유자산의 약 30%가량을 세금으로 물어야 한다. 영주권자 역시 포기일 직전 15년 중 최소 8년 이상 미국에 거주하고 세금을 냈다면 시민권자와 동일하게 국적포기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외자진신고프로그램(Offshore Voluntary Disclosure Program· OVDP)을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OVDP는 지난 8년간의 해외 금융 자산을 자진 신고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미국은 2012년 1월 9일부터 OVDP 3차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미신고된 해외 금융 자산을 자진 신고할 경우 지난 8년 동안의 연간 잔액 중 최고액의 27.5%와 미납 세금, 이에 따른 이자를 모두 납부하는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 PB는 “OVDP는 미 조세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해결 방안으로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실제 자산가들 중에는 이를 활용하는 데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더 많다”고 밝혔다. 지난 8년간의 세무신고서 원본 등 준비 자료가 방대한 데다 미납 신고 금액에 따라 부담해야 할 과태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원종훈 국민은행 WM사업부 세무팀장은 “FATCA는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용이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FATCA의 규정과 적용 요건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며 “그러나 무엇보다 최선의 방법은 정확하게 자산을 신고하고 성실하게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흔 기자 ver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