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을 가다 대구광역시·경북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대구는 대한민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잘나가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이 지역 부의 흐름은 시계가 멈춘 듯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1980년대 부를 움켜쥔 1세대 부자들의 고령화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2세대 신흥 부자들은 이들 1세대로부터 부를 대물림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1980년대 대구 최대의 산업단지 대구성서공단 전경.
1980년대 대구 최대의 산업단지 대구성서공단 전경.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3 한국부자보고서’에 따르면 대구 지역의 부자는 7200여 명 정도로 인구 대비 부자 수의 비율은 0.29%에 달한다. 서울(0.77%)과 부산(0.35%)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대구에 이토록 많은 부자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 알게 모르게 특혜를 받아 온 영향이 컸다는 시각이 없지 않다. 대구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한 금융권 프라이빗뱅커(PB)는 “1970년대 부를 축적한 이들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수혜를 입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며 “반면 아들 세대의 경우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이재철 하나대투증권 상인동지점 차장은 “대구뿐 아니라 경북 지역은 전체적으로 구미나 포항 등 대기업의 거대 산업단지와 맞물려 부촌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고, 슈퍼리치들 역시 해당 기업의 임원 등으로 종사한 이들이 적지 않다”며 “현재는 LG와 삼성 등의 대기업도 구미에서 경기도 시흥 등으로 투자처를 옮겨 가는 상황이고, 1990년대 이후 대규모로 부를 형성할 만한 모멘텀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현황을 설명했다.


공장 부지가 금싸라기 땅으로 변신
그렇다면 대구·경북 지역의 부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장숙제 우리은행 대봉동지점 부지점장은 “이 지역의 슈퍼리치는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섬유산업이 성장하면서 경산 지역 등 산업단지에 공장을 운영하던 전통 부자들이 대다수”라고 전했다. 이들 전통 부자들의 부의 원천은 다름 아닌 땅이다. 서대구 섬유산업단지를 비롯해 대규모 산업단지가 한창 조성되던 시절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며 급속도로 자산을 불릴 수 있었던 셈이다.

이들 전통 부자들은 20~30년 동안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 않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한 곳을 특정하기 어렵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중구 대봉동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6월 9일 찾아간 대봉동 일대의 아파트들은 겉보기에는 그리 호사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장숙제 부지점장은 “우리 지점의 고객들만 하더라도 평범한 할아버지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한 자산가나 회장님들이 많다”며 “대부분은 부부가 여유롭게 해외여행이나 크루즈 여행을 다니며 여생을 즐기거나, 손자·손녀들에게 용돈을 쥐어 주는 재미로 지내는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대구에서 가장 비싼 집값을 자랑하는 두산 위브 더 제니스
대구에서 가장 비싼 집값을 자랑하는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이와 비교해 신흥 부자들의 경우 1세대 부자인 아버지로부터 자산을 물려받은 ‘상속 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가업을 승계해 사업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의사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상속 부자 외에 40~50대 신흥 부자들 역시 직업이 의사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하는 점이다. 이는 인근에만 총 5개의 의과대학이 위치하고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들 신흥 부자들은 대부분 대구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값을 자랑하는 수성구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 위치한 두산 위브 더 제니스의 3.3㎡당 가격은 1500만 원 정도.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롯데 캐슬 또한 비슷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수성구 범어네거리는 다른 지역과는 분위기부터 확연히 달랐다. 호화롭게 치장된 고층 아파트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고, 아파트 단지마다 드넓은 공원은 물론 주차장엔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대구 지역 전체 13곳 외제차 매장 중 11곳이 바로 이 수성구 인근에 몰려 있을 정도다. 비교적 젊은 나이대의 신흥 부자들이 하나같이 이 지역을 선호하는 것은 범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명문 학군 때문이다.
대구의 전통 부자들이 거주한다는 중구의 한 아파트
대구의 전통 부자들이 거주한다는 중구의 한 아파트
보수적 투자 성향
“수익형 부동산 아니면 예·적금”

“돌다리를 10번 두들겨 보고도 한 번 더 두들겨 본다.” 대구·경북 지역 부자들의 투자 성향을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하자 이 지역 PB가 한 대답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투자처는 다름 아닌 부동산이다. 그중에서도 은퇴 후 자신이 운영하던 공장을 처분하는 대신 이를 임대해 꽤 짭짤한 수익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장숙제 부지점장은 “고객 중 한 분은 2~3년 전쯤 자신이 운영하던 공장을 정리하고, 물류창고로 이용해 여기에 30여 개 정도의 영세 브랜드에 임대했는데 그 수익만 한 달에 2000만~3000만 원에 달한다”고 사례를 들려줬다.

공장부지 임대 외에 일반 상가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다. 하지만 이 경우 실질적으로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편은 아니라고 한다. 이종복 대구은행 PB센터 팀장은 “이분들의 입장에서야 늘 해 오던 방식이기 때문에 정보를 얻는 데 쉽고, 정보가 있으니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며 “막상 임대 수익을 얻기 위해 신경 쓸 일들이 많아지면 발을 빼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진짜 투자 의사가 있는 경우 대구 지역보다는 서울이나 부산 등에 눈길을 둔다”며 “예를 들어 건물을 5채를 갖고 있는 슈퍼리치라면, 서울에 2채, 부산에 2채, 대구에는 1채만 투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대구 현풍 지역의 아파트 분양 현장.
대구 현풍 지역의 아파트 분양 현장.
그러나 서울에 비해 비교적 낮은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전체적인 자산의 비중으로 보자면 부동산 자산 비중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이들의 부동산 자산 비중은 대략 30~35% 정도. 반면 50% 이상이 금융 자산인 셈이다. 대구 지역의 한 PB는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평균치를 내기는 어렵지만 예·적금의 비율이 50%에 가까울 만큼 절대적이며, 펀드와 주식은 30%가량, 그 외에 보험과 연금 등이 25% 정도”라며 “최근에는 예·적금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펀드와 주식의 비중은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흐름은 대구 지역 증권사들의 현황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대구 지역 증권사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우리 지점만 하더라도 고객들의 총투자 금액이 2000억 원대에서 1500억 원대로 줄어든 상황이고, 다른 증권사들도 지점을 철수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는 주식투자와 같은 직접투자의 비중이 점차 줄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박희철 대구은행 PB센터 팀장은 “60대 이상 슈퍼리치들의 경우 대구 지역에서는 투자할 곳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며 “특히 199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부자들일수록 최근의 대구 경제에 대한 불신이 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몇 가지 개발 호재로 대구 지역에도 훈풍이 불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인 대구시 달성구 현풍면이 그곳이다. 최근 들어 대규모 산업단지인 테크노폴리스가 들어서며 투자자들 역시 들썩이고 있다. 이곳 부지의 3.3㎡당 가격은 최근 2~3년 새 50% 이상 뛰어올라 현재 300만 원을 웃도는 가격에 거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철 차장은 “이 같은 흐름이 긍정적으로 작용해 대구 지역 투자자들의 지갑을 열고 지역 경제에 돈이 돌기 시작한다면 부의 흐름 역시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겠냐”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COVER STORY] 전통 부자 고령화 ‘뚜렷’ 투자 시계 멈췄다
대구=이정흔 기자 ver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