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란 김안과병원장

김용란 김안과병원장은 1962년생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 김희수 현 건양대 총장은 영등포 로터리에 김안과의원(지금의 김안과병원)을 개원했다. 동갑내기 김안과는 어린 시절 김 원장에게 용돈 벌이 장소였고, 안과의가 되고 나서는 수련의 장이었다. 올 1월 병원장에 오른 뒤로는 목숨 걸고 지켜 내야 하는 경영의 대상이 됐으니, 말 그대로 “김안과는 내 운명”이라는 것이 김 원장의 얘기다. 김안과병원이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김 원장은 동네 어귀의 작은 의원이 100년에 걸쳐 세계적인 병원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할 생각이다.
[SUCCESSOR] “김안과는 내 운명, 그러니 목숨 걸고 지켜 내야죠”
“저한테는 병원을 사수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김용란은 김안과의 역사니까.”

다부진 외모와 쾌활한 말투, 김용란 김안과병원장의 첫인상은 푸근한 엄마보다 친근한 언니 쪽에 가까웠다. 처음 본 기자에게 올 초부터 시작한 다이어트 성과나 얼마 전 직원 생일날 카드를 써서 전달했다는 등 사소한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하지만 대화 주제가 김안과병원(이하 김안과)의 현재와 미래로 흐르자 그의 표정이 금세 비장해졌다. 그렇게 그는 인터뷰 내내 옆집 언니와 신임 병원장을 오갔다.

김 안과는 한국전쟁으로 의료 환경이 낙후됐던 1962년 안과 의사인 김희수 박사가 서울 영등포에 설립한 병원이다. 개원과 동시에 1년 365일, 24시간 진료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구축, 환자 중심의 의료원으로 큰 주목을 끌었다. 당시 직원 3명의 의원으로 시작해 오늘날 안과 전문 병원의 효시가 된 김안과는 지금도 연간 42만 명의 국내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병원 고도의 성장기에는 “김안과가 돈을 쓸어 담는다”는 말이 정설이었을 정도였으니, 김 원장의 유년기는 꽤 풍요로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악의 의료 환경 속에서 병원장을 맡게 된 지금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난관을 만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긍정적 마인드와 김안과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이를 돌파해 나가고자 한다.


병원장에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많이 바쁘시겠어요.
“지난 4년 동안 부원장을 해 왔으니 경영적인 측면에서 업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다만 사소한 일부터 굵직한 업무까지 최종 결정권자가 돼야 한다는 게 무게로 다가오더군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있어요. 취임식 때 이야기했듯 직원들과 소통하고 스킨십도 늘리고 있죠. 요즘 여성시대잖아요. 소프트 파워를 발휘해 친근하면서도 섬세한 경영을 하려고 합니다.”


김안과와 같은 해에 태어나셨죠. 동갑내기 병원의 경영인이 돼 감회가 새롭지 않나요.
“같은 해에 태어났고 지금껏 함께했죠. 김안과는 내 인생이에요. 중학교 시절엔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조그마한 의원이라 조무사 3명밖에 없던 시절이거든요. 간호사가 약을 제조해 주면 나는 흰 종이에 포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레지던트 끝나고부터는 배움의 장소였어요. 김안과에서 정말 많은 환자를 거치며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거든요. 김안과는 안성형, 녹내장, 사시 분야에서 어딜 가도 꿇릴 게 없어요. 경영인이 되고 보니 김안과를 직원들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게 돼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우리 직원들이 더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합니다.”


오는 길에 영등포 문래역에서 70대로 보이는 할머니에게 김안과 위치를 여쭈었는데요, 길을 알려주시면서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니가 20년도 더 전에 거기서 수술 받았다”고 하시더군요.(웃음)
“하하. 정말 고마운 분이시네요. 병원이 60년쯤 되다 보니 이제 3대가 오는 경우는 흔해요. ‘병원이 없어지면 안과 질환을 가지고 있는 이 응급 환자들은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 반드시 지켜 내야 한다는 마음이 들죠.”


요즘 중소 병원 간 출혈 경쟁이 심한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영을 맡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안과 분야에서 백내장의 포괄수가제도가 시작되고 불경기가 겹치면서 상황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다른 사람보다 병원과 설립자(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내가 병원을 맡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욕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게 낫다고요.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죠. 한쪽 다리가 부러져도 ‘양쪽이 안 부러진 게 어디야’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런 긍정 DNA는 아버지(현 건양대 총장인 김희수 김안과 창립자)에게 물려받은 건가요.
“총장님께서는 정부의 의료 정책 때문에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있을 때도 ‘나라에서 먹고 살 길을 터주고 법안을 만든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60년 넘게 의료계에 몸담으면서 힘든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특유의 긍정심과 의연함으로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어오셨어요.”
[SUCCESSOR] “김안과는 내 운명, 그러니 목숨 걸고 지켜 내야죠”
더디 가도 눈앞 이익 급급 안 해…환자 행복 위해 매일 108배 하는 병원장
김용란 원장은 김안과 개원 이래 최초 여성 원장이면서 설립자인 김희수 총장의 둘째 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사람들의 눈을 고쳐 주는 아버지를 보며 의사의 꿈을 키웠다. 언니와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지만 4남매 중에 유일하게 그만 의사가 됐다. 김 원장은 “아버지가 딸이라고 해서 무조건 병원장 자리를 넘겨준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순발력을 발휘해 보라는 의미로 병원을 맡긴 것 같다”고 말했다. 연세대 원주의대 1년 선배인 그의 남편 김성주 교수도 2006~2009년 김안과병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아버지 김희수 총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2~3년 전 건양대병원에서 ‘나비넥타이 메기 운동’을 이끄셨어요. 환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병원 안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의사들의 진료 복장을 바꿨죠. 그만큼 인간적인 의사이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경영인이었어요. 늘 4시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체크하시기에 ‘나이 먹고 잠이 없어졌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알게 됐습니다. 매일 아침 이 악물고 일어나신다는 것을요. 가족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사셨는데 우리는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시원하고 편하게 살면서도 너무 몰랐구나 싶어 죄송했지요. 또 원칙주의자셨어요. 건양대를 세울 때도 주변 사람들은 ‘그 돈을 들여 골치 아프게 대학을 세우느냐’며 ‘골프장이나 지어서 쉬시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뜻을 꺾지는 못했어요.”


아버지는 자녀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하셨겠어요.
“자녀들의 인생은 자녀들의 것이라고 생각해 진로에 대해선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어요. 의사가 된 것도, 안과를 택한 것도, 또 지금 경영을 하는 것도요.”


그럼 왜 의과대학을 갔습니까.
“중·고등학교 때 자연스럽게 의대 진학으로 좁혀지더라고요. 계속 김안과와 함께하다 보니 그랬을 거예요. 의대에 오고 나서도 처음엔 반항심이 있어 ‘안과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인턴을 하게 되면서 안과를 다시 보게 됐는데, 백내장 수술을 한 뒤 너무 행복해하는 환자를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죠.”


병원 경영 석사과정을 밟은 건 병원을 물려받기 위해서였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건양대 병원 경영 석사) 학위 가운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하하. 아버지는 영등포의 작은 동네 병원에서 시작해 몸집 불리는 과정에서 타 병원들과 경쟁하며 체계적인 병원 경영의 필요성을 체감하셨어요. 직원들 챙기는 것부터 환자에 대한 서비스 정신까지 병원 경영은 의사로서의 단순한 치료를 넘어서는 분야라고 늘 강조하셨죠. 나 역시 병원 경영에 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병원을 경영합니까.
“당장 눈앞 이익에 급급한 게 아니라 더디 가더라도 창립자가 세운 원칙을 잘 따라가는 거죠. 김안과는 개원 이후 줄곧 ‘365일 연중무휴, 24시간 진료’ 원칙을 지켜 오고 있어요. 급한 치료가 필요하거나 바쁜 일정으로 인해 병원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눈이 아픈데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환자 중심 철학이죠. 또 우리 의료진은 치료에 있어서도 병원의 영리 목적보다는 환자의 눈 건강을 우선시합니다. 환자가 라식 수술을 원하는데도 라식 수술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면 잘 설명해서 돌려보내요.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해 이 분야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하거나 하지 않죠.”


김안과가 캄보디아 봉사로도 유명하더군요.
“의사의 기본 덕목은 봉사입니다. 캄보디아는 자외선이 강해 앞을 못 보는 백내장 환자가 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수술한 뒤 앞을 보며 자기 발로 걸어 나갑니다. 올해로 딱 1000건 수술했어요. 예전엔 환자를 치료하면 내가 누굴 도와줬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봉사로 인해 내가 받는 게 훨씬 많은 것 같아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건 안 되죠. 그게 오늘날 김안과를 있게 한 정신이에요.”


‘108배 하는 병원장’이시죠. 어떻게 절을 하게 됐나요.
“캄보디아 봉사를 갔다가 알게 된 선생님이 10년 넘게 108배를 해 왔대요. 처음에는 한번에 108배를 못 하다가 지금은 매일 아침 108배를 올립니다. 화내는 내 성격에 대한 반성, 부모님을 위한 기도, 우리 가족과 나를 위한 기도, 굶주린 세계 어린이를 위한 기도를 해요. 그중에서 많은 부분이 우리 김안과를 거쳐 가는 환자들과 직원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기도입니다.”
[SUCCESSOR] “김안과는 내 운명, 그러니 목숨 걸고 지켜 내야죠”
중소 병원으로서의 계획은 어떠한가요.
“현재 국내 안과 전문 병원 최초로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인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 인증을 준비 중이며 올 하반기에는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 같아요.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부터 1300여 가지 평가 항목을 인증받음으로써 의료의 질과 환자 안전 측면에서 전문성을 실질적으로 증진하고, 이를 환자들에게 인정받도록 할 겁니다. 종합병원과 관계된 항목이 많은데, 안과 전문 특화 입원실 있는 병원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어요.”


김안과가 100년을 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김안과의 존재 이유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미국의 안과 타운처럼 우리는 안과로서 전문성을 계속 키워 나갈 거예요. 김안과는 강남의 성형외과와 존재 가치가 달라요. 그런 병원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다르죠. 김안과에 희망을 걸고 있는 중증 환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세계 일류의 눈을 위해 병원을 지속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어요.”


가업을 이으려면 집안에 의사가 계속 배출돼야겠군요.
“지금 저희 조카가 안과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어요. 그 녀석이 앞으로 20년 정도 끌어 주고 그다음에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저희 큰아들이 끌어 주면 3대가 운영하는 100년 병원이 되겠지요.”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