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Fan)를 든 여인
자포니즘은 유럽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유럽 회화에 담긴 자포니즘의 흔적을 추적해 본다.

부채는 186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각종 부채가 실용품을 넘어 수집품이나 실내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 접부채는 여성 패션의 중요한 일부로 여겨졌다.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그림 ‘야회’에서처럼 여성이 사교모임이나 공연장에 갈 때면 드레스와 모자로 성장(盛粧)을 하고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패션이 완성됐다. 이처럼 부채가 크게 유행한 것은 ‘자포니즘(Japonisme)’이라 불리는 일본풍의 성행 덕분이었다. 자포니즘은 유럽 미술에 대한 일본 예술문화의 영향을 일컫는다. 박람회나 무역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일본 미술품이나 일용품들은 주로 인상주의 회화와 장식미술의 독특한 양식을 발달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자포니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이 잘 보여 준다. 모네도 다른 화가들처럼 일본풍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조경, 실내장식, 수집 등 생활 전반에서 일본 것을 즐겼다. 그림 ‘일본 의상을 입은 모네 부인’에서 모네는 아내 카미유에게 아예 기모노를 입혔다. 그녀는 선명한 붉은색 기모노에 싸인 몸을 살짝 비틀며 옆으로 서서 부채를 얼굴 앞에 펼쳐 들고 있다. 동양풍 꽃무늬와 일본 무사가 수놓인 그녀의 옷은 발치에서 넓은 옷자락이 부채꼴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배경을 장식하는 것도 부채다. 둥근 부채들이 뒷벽에 가득 붙어 있고 바닥에도 떨어질 만큼 풍부하다. 수많은 부채와 바닥의 재질과 문양까지 모든 환경이 일본을 가리킨다. 여인의 머리가 금발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일본 사람을 그린 작품으로 보였을 것이다.
모네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그저 일본풍을 찬양하거나 당시의 경향을 반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잘 팔리는 주제를 택한 것이었다. 그는 특유의 생략된 신속한 붓질을 쓰지 않고 보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대상을 꼼꼼히 묘사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고, 예상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훗날 그는 이 그림에 대해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졸작이라고 자평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펼쳐지는 부채의 향연 속에 붉게 피어나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즉시 빠져들곤 한다.

인상주의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그림 ‘무도회에서’는 부채를 펼쳐 든 여인의 초상을 보여 준다. 당시 부르주아 여성이 무도회나 오페라에 가는 것은 교양 있는 여가생활의 하나로, 지위와 미모를 과시하고 남성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기회였다. 이때 부채는 몸치장의 일부로 여성이 으레 지참하는 소품이었다. 모리조는 그러한 관습에 따라 무도회에 참석한 부르주아 여성을 그렸다. 그런데 그림에서 펼친 부채는 인물의 얼굴을 비껴나가 오른쪽 그림틀에 의해 잘리면서 화면을 비대칭으로 만든다. 그 대신 인물의 시선이 반대쪽을 향하고 있어 구도상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 여성은 화면 밖 뭔가를 주시하며 자신의 호기심을 추구하는 동시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은근히 노출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부채는 표정을 수시로 가리기도 하고 내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의 심리와 은유적으로 잘 부합된다.

접부채는 펼치면 얇은 평면과 규칙적인 부챗살, 가장자리와 안쪽의 둥근 곡선만으로도 훌륭한 조형미를 형성한다. 선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장식을 첨가한다면 또 다른 예술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부채를 접으면 그 모든 것이 감쪽같이 숨어버린다. 전혀 다른 막대 모양으로 변해 그것으로 무엇을 지시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 유럽의 회화 속에서 부채는 흔히 여성적 특징과 연결되지만 사실상 이면에는 힘, 권위, 페니스와 같은 남성적 속성이 들어 있다. 19세기 후반 카사트는 독신으로 활동하며 남자들의 세계에서 예술과 경제를 겨뤄야 했다. 그녀는 그림 속 검은 옷의 여성에게 부채를 들게 함으로써 그동안 숨겨진 부채의 남성적 측면을 표면으로 끌어낸다. 이는 화가 자신이 지닌 욕망의 반영이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접힌 부채는 전혀 바람을 일으킬 것 같지 않지만 어쩐지 앞으로 여성에게 불어올 변화의 바람을 예고하는 것 같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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