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대졸, 연소득 약 5300만 원 이상, 장년층 이상’.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2011년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발표한 ‘투자 사기를 가장 많이 당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들이 투자 사기의 위험에 노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OPINION]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와 자산관리업의 성공 조건
미국은퇴자협회는 금융 사기가 점점 증가하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주로 사기를 당하는지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물론 조사의 목적은 금융 사기에 취약한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분석해 보니 전혀 보호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투자 사기의 피해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금융 지식과 정보가 많아도 잘못된 금융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금융 소비생활에 대한 종합 케어 서비스 절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가정이 잘못됐다는 것은 심리학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이 줄곧 주장해 왔던 내용이다. 그는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Think, fast And slow)’에서 인간의 생각은 두 가지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데, 첫째가 직관적이고 지극히 심리적인 자동 시스템이고, 둘째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숙고 시스템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대개 자동 시스템에 의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기 쉽다고 한다. 결국 사회 경제 제도가 인간이 가진 합리성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제도 또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나라 금융시장에서도 연달아 엄청난 금융 피해 사건이 터졌다. 저축은행 후순위채 사태부터 동양그룹 사태까지 불완전판매로 인한 금융소비자들의 피해가 엄청났다. 그뿐인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지만 않았을 뿐, 투자 현장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불완전판매나 금융소비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영업 행위가 성행하고 있다. ‘수수료나 보수가 높은 상품의 판매, 캠페인이 걸린 상품 추천, 잦은 매매를 부추기거나 상품 갈아타기를 유도하는 행위, 애초부터 투자자에게 불리하도록 구조화된 상품 개발 등 열거하기에도 숨 가쁜 많은 다툼의 사례가 있다.

과연 이런 문제들이 투자자에게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결될까. 대답은 당연히 ‘노(No)’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만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인간이 가진 합리성의 한계를 충분히 고려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먼저 패러다임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금융소비자에게 더 이상 똑똑하기를 강요하지 않으며, 둘째, 금융회사의 양심에 의존해 방관하지 않을 것,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시장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투자자의 복지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어려운 조건일까. 어려울지언정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선진국 중에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됐고 보완 단계에 있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도 벌써 이러한 대안적 패러다임의 도입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자산관리 시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인데,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는 금융상품 자문업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자산관리란 무엇인가. 전반적인 금융 소비생활에 대한 종합 케어 서비스다. 가계와 장기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계의 여러 재무 목표에 잘 도달할 수 있도록 자산 배분, 상품 선택 및 관리를 일괄 제공하는 형태다. 그동안 자산관리 서비스는 금융상품 판매를 위한 부가 서비스 형태로 주로 존재했으며, 대부분 주식 종목을 추천하는 투자 자문 등과의 구분도 모호해 명확한 서비스 영역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금융소비자의 전문적인 대리인으로서 금융 산업의 중심에서 매개 역할을 해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보상이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산관리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자산관리업자와 투자자의 이익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보수 구조를 제대로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의장이었던 아서 레빗(Arthur Levitt)은 그의 저서 ‘테이크 온 더 스트리트(Take on the street)’에서 “보상이 행동을 결정한다(compensation determines behavior)”라는 말을 했다. 만약 자산관리 보수가 그가 추천한 상품에서 나는 수익에 연동돼 있다면 자산관리업자는 다소 위험한 투자를 권유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상품을 사고 팔 때마다 보수를 받는다면 잦은 매매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금융상품 판매 시장이나 브로커리지 시장이 본질적인 한계를 갖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상품을 사고팔 때마다 거래 수수료를 받는 보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산관리업자의 보수가 투자자의 이익과 함께 갈 수 있도록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보수 구조가 체계화돼야 한다.

현재 영국의 독립투자자문업자(IFA)의 경우 자산 규모 비례, 상담 시간이나 횟수 비례 등 다양한 보수 지불 방식이 있는데, 정답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이해관계가 엇갈릴지 모르므로 얼렁뚱땅 만들면 안 된다. 자산관리 서비스 시장의 명운을 좌우할 내용이므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현재 금융상품 시장의 보수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상품의 개발이나 운용에 들어가는 비용, 상품 판매에 들어가는 비용,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 등을 명확하게 분리해 소비자가 누리는 서비스별로 비용이 지불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가 자산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때 동일한 서비스에 대해 이중으로 돈을 지불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조건은 소비자의 인식과 문화 형성이다. 현재 금융소비자들은 자산관리 서비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 서비스의 가치와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자산관리 서비스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새로운 시장이 형성 초기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웨딩 컨설팅업체가 있었을까. 예전에는 신부 몫이었던 결혼 준비가 맞벌이의 증가로 아웃소싱이 되면서 웨딩 컨설팅업체가 성장했다. 지금 웨딩 컨설팅은 하나의 소비문화로 자리 잡았다.

중요한 것은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에 소비자가 굉장히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이 평판을 형성하고 평판이 수요가 되며, 반복된 수요가 문화로 자리 잡는다. 어설픈 자산관리 서비스로는 금융소비자의 인식을 바꾸고 문화를 형성할 수 없다. 즉, 시장을 형성한답시고 초기에 자산관리업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오히려 해당 산업의 발전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전문 재무설계사인 CFP(Certified Financial Planner) 중에는 변호사나 회계사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자산관리업자들의 수준도 여기 못지않게 전문성을 높여 신뢰가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도의 역할일 것 같다.

지난번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은퇴 기금 확보에 관한 세미나에서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가질 미래의 연금제도는 굉장히 정교하게 움직이는 경주용 자동차가 아니다. 오일 교체를 간혹 잊어버려도, 운전 솜씨가 험악해도 여전히 잘 굴러가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는 튼튼한 자동차다.” 금융소비자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실수를 해도, 서툴러도 그들을 목적지까지 태워다 줄 우리의 자동차를 만들어야 할 때다.
[OPINION]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와 자산관리업의 성공 조건
김일선 미래와금융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