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건축 전문가 김희곤 ‘스페인은 건축이다’

지금 스페인은 ‘핫’하다. 정열과 자유, 낭만 등으로 상징되는 스페인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분위기엔 TV 프로그램 ‘꽃할배(꽃보다 할배)’ 4인방의 감탄사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보인다.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출판계에서 스페인 관련 서적들을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눈에 띄는 하나가 있으니 건축을 통해 바라본 스페인의 민낯이다.
[BOOK WE ATTEND] 경이로운 걸작이 주는 인생에 대한 가르침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와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 그리고 세기를 통틀어 대체 불가능한 천재 건축가 가우디까지 스페인을 상징하는 이 이름들에는 스페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들어 있다. 모방할 수 없는 ‘그들만의 무엇’을 간직한 채. 김희곤 건축가(57)는 그 ‘무엇’에 대해 ‘역사’와 ‘민족성’을 꼽는다.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인과 유대인, 아랍인들이 조화롭게 공존했던 시기, 이슬람 왕조가 멸망한 후 다원주의가 사라진 시대 등 때론 찬란했고 때론 암울했던 역사를 지나오며 스페인은 유럽의 어느 하나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아닌 다양성을 품은 유일한 하나 ‘온리 원(only one)’의 존재감이 됐다.

정열과 낭만의 나라, 축제의 나라 등 스페인에 열광케 하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지만, 건축을 빼놓고 진짜 스페인의 민낯을 설명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위대한 걸작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그것도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 안달루시아, 카스티야라만차 등 스페인 전역에 걸쳐. ‘스페인은 건축이다’(오브제)가 그간 스페인 건축을 다뤘던 수많은 책들과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 압도적인 신비감, 흉내 낼 수 없는 위용을 넘어 그 뒤에 숨은 탄생의 역사와 배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니 일반적인 감탄사 그 이상의 희열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처럼 스페인 건축을 바라보는 분명 다른 시선은 오롯이 저자의 몫이다. 2001년, 마흔넷 늦은 나이로 스페인 유학을 떠난 국내 1호 건축가라는 이력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명감이다. 또 하나 보태자면 세기의 걸작이라 불리는 건축물들 앞에서 그가 느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에 대한 공유이기도 하다.


소통과 공감의 시대, 스페인 건축이 주는 삶의 지혜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0년간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숱하게 현장을 경험한 저자에게도 스페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스페인이라는 나라 자체가 미개척 분야였으니 건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늦은 나이에 20대 청춘들과 어울리며 몸으로 겪은 스페인의 독특한 문화는 건축에도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이질적이고 독창적인 것들이 각각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루며 고유함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에 그야말로 넋을 잃은 그는 그날로부터 스페인 건축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 건축의 백미 알람브라 전경.
이슬람 건축의 백미 알람브라 전경.
스페인 건축을 다룬 기존의 책들과는 관점이 달라 보입니다.
“그렇죠. 그간 스페인 건축에 대한 책들은 많았지만, 건축 전문가의 시선에서 바라본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걸작이라고 꼽히는 건축물을 보고도 그저 ‘멋지다’, ‘대단하다’라는 감탄만 있을 뿐 건축이 그 자리에 있기까지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토리를 이해하고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건축이 주는 감동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가면 다르게 이해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또 하나, 마드리드와 카스티야라만차, 안달루시아, 바르셀로나 등 네 가지 골격으로 나눠서 이야기하는 것도 여느 책에서는 볼 수 없던 구분일 겁니다. 적어도 그 점에서만은 ‘내가 아니면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요. 여행자의 시각으로는 분명 안 되는 부분이니까요. 독자들이 그것만 알아줘도 반은 성공이라 생각해요.”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스페인이 낯설었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미지의 세계였어요. 반쯤은 알고 있고 반쯤은 베일에 가려진 그런 나라였죠. 건축 유학이라고 하면 최근 동대문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등을 배출한 영국 런던의 AA스쿨이 명문으로 손꼽히는데 저 또한 그곳을 선호했었어요. 그런데 당시 지도교수가 적지 않은 나이에 떠나는 유학이니만큼 남들이 가지 않은 나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 건축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죠. 막상 가 보니 스페인은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던 세계를 만나게 됐죠.”
스페인 가톨릭 정신의 뿌리인 톨레도 성당.
스페인 가톨릭 정신의 뿌리인 톨레도 성당.
어떤 문화적 충격을 말하는 건가요.
“두 가지 측면이었어요. 하나는 종교적 관점에서의 충격이었죠. 유학 당시 중세 성당을 복원, 재생하는 쪽을 전공하다 보니 매주 현장에 나가 성당만 봤는데, 어느 날 스페인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중세 기독교 왕국의 박해를 이겨내고 화석처럼 빛나는 이슬람 건축물들을 간직한 톨레도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슬람에 대해 아주 우습게 생각했었어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런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이슬람 건축은 보는 순간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 이후 스페인 건축이란 게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가우디 건축의 원류가 이슬람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또 하나의 충격은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어요. 제가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게 최대 관심사였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24시간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죠. 스페인 광장과 길의 문화는 곧 축제의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이슬람 문화와 스페인 특유의 민족성이 건축에 끼친 영향이 컸다고 보시는군요.
“물론입니다. 스페인 건축은 로마네스크 양식, 무데하르 양식을 소중히 계승해 중세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을 차례로 융합해 스페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켜 왔지만, 그중에서도 이슬람의 영향은 절대적이었어요. 스페인 건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우디의 건축들을 봐도 기하학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고, 구엘 공원과 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조립식 건축 방법이나 정신 또한 이슬람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어찌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나 포용력 등도 이슬람으로부터 온 것들이에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았던 그들이니까요. 스페인 건축이 주는 인생에 대한 교훈도 여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정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가우디의 대표 건축물 구엘 공원.
요정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가우디의 대표 건축물 구엘 공원.
프롤로그에서 ‘스페인 건축은 나에게 인생은 어떻게 설계하는 것인지, 낡은 영혼을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 버거운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가르침을 주었나요.
“관념과 실행의 분리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죠. 건축뿐만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정량화, 계량화가 필요하죠. 그런데 우리의 문화는 장인들이 혼자 끌어안고 가는 경향이 강하잖습니까. 그러니 관념과 실행, 그 사이에 간극이 많고 융화가 되지 않는 거죠. 그 부분에서 제가 나이 들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을 하게 했죠. 또 하나, 스페인 건축에는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21세기 공감과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고, 그런 면에서 스페인 건축에 담긴 공존하는 삶의 지혜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바이죠.”


그밖에 스페인 건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뭘까요.
“스페인 건축가들도 알고 보면 가난합니다. 일명 ‘스타’들만 잘 되죠. 그런데 학교에 가서 놀랐던 게 30%를 낙제시키더군요. 그 핵심에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죠. 등수를 나누는 게 정말 이상해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진짜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즐기면서 하고 있었습니다. 과정의 치열함까지 말이죠. 헌데 우리는 말로는 과정의 중요성을 논하지만 늘 결과에 치중하잖아요. 우리가 그들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좋아서 하고, 즐기면서 하고, 미쳐서 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분명 달라질 거예요. 스페인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엄청 노력하며 살아요.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즐기려고 하죠. 공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예요. 가우디가 중정(中庭)이나 파티오를 만들었던 걸 떠올려 보면 쉽게 설명이 되죠.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 공간에 대한 소유권만 있고 함께 즐기는 데는 인색하잖아요. 같은 공간이라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행복으로 채우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될 테니 말입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인물)·다산북스(건축 사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