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밖 정도전을 만나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에서 정도전을 맡은 배우 조재현과 이성계로 분한 유동근, 그리고 이인임 역의 박영규.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에서 정도전을 맡은 배우 조재현과 이성계로 분한 유동근, 그리고 이인임 역의 박영규.
정도전,
벼랑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려 말 원나라는 중원 땅을 잃고, 북쪽으로 밀려났다. 이인임, 경복흥 등은 친원(親元)정책을 주장했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은 명나라의 부각에 주목했다.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오라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 이인임, 경복흥 등이 원나라 사신 접대를 명하자 정도전이 찾아가 한 말이다. 이 일로 정도전은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전라도 회진현(나주)에 있는 천민 거주지인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유배지의 삶은 혹독하고 고독했다. 그에게 아내가 원망 가득한 편지를 전해 왔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 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집안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국법에 저척돼 이름은 더럽혀지고 행적은 깎이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풍토병이나 걸리고 형제들은 쓰러져서 가문이 망해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삼봉집’ 중 ‘가난’)

아버지 정운경의 성품과 강직성을 이어받은 정도전은 유배를 면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다. 정운경은 관직이 높지는 않았으나 친우들이 그에게 청렴하고 의롭다는 뜻의 ‘염의(廉義)선생’이라는 시호를 지어 주었다고 전한다.

정도전(1342~1398)은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이색의 제자였고, 뛰어난 유학자 정몽주와 가깝게 교류했다. 20대 초에 과거에 합격한 그는 성균관 교관을 지내기도 했는데, 30대에 가문이 망하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그런데 그는 불모지 광야 같은 귀양지에서 거듭나게 된다. 인간 존재의 뿌리까지 내려간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백성들은 순박하면서도 자연과 삶의 이치를 꿰뚫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었다. 그들은 정도전을 따뜻하게 품었고, 놀라운 혜안과 통찰을 보여 주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됐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었다. 조선을 개창하고 조선의 거의 모든 것을 설계한 정도전의 혁명사상은 바로 이곳 천민 마을에서 싹텄다.

“다만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멀리 귀양 왔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두텁게 대접하니 이는 나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서일까?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당시의 의논을 듣지 못하여 내가 죄 있는 자인 줄 몰라서일까? 아무튼 모두가 지극히 후대해 주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하여 그 시말(始末)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시한다.” (‘삼봉집’ 중 ‘소재동기’)


운명을 바꾼 만남, 이성계와 정도전
한창 때인 34세에 유배형에 처해진 정도전의 유배·유랑 생활은 9년째 지속됐다. 당시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버리네. 천지가 능히 나를 용납하려나. 바람 부는 대로 맡길 수밖에”라고 소회를 밝힌 그는 42세에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전격적인 인생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1383년 정도전은 그렇게 함경도 함주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원·명 교체기라는 동북아시아의 격동기 속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유약함을 봤다.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그는 왕이 될 수 있다는 꿈을 키웠다.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의식이 강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강한 군대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심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정책, 통치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정도전의 역할이었다. 정도전은 혁명적인 개혁이라는 개국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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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한고조에 빗대서 자신의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다. 이성계는 일곱 살이 어린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셨다. 조선을 개국하기 전, 이성계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피력했다. 정도전은 “지금 물러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 헤아릴 수 없는 재화(災禍)가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며 거듭 만류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왕사(王師)로 삼았고 죽을 때까지 신뢰했다. 이성계 없는 정도전,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공부 추구, 정치·경제·사회·법 등 전 분야 전문가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1398) 정도전 졸기)

정도전을 죽인 태조 이방원이 왕으로 있을 때의 기록이다. 그런데도 정도전의 역할을 사실대로 남겼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혁명과 천명을 강조했다. ‘맹자’를 즐겨 읽은 그는 백성들의 실상을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철저하게 견지하게 됐다. 백성은 먹고 사는 것이 해결돼야 윤리적인 심성도 갖는 법이라고 본 맹자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 했다.

“백성들로 하여금 살고 죽는 것에 한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민이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고 군은 가볍다. 이렇기 때문에 민의 신망을 얻어야 천자가 될 수 있다.”(‘맹자’)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
고려 말 온건개혁파인 이색도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로지 밭에 있을 뿐이다”라며 당대의 토지 문란에 분노할 정도로 고려는 이미 천심을 잃고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창한 역성혁명파는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있고, 민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제(田制)가 고른지 고르지 못한지에 있습니다.”(‘고려사절요’ 창왕 1년)

위화도 회군(1388년) 이후, 역성혁명파가 주력한 것은 토지 문제 해결을 통한 민심 잡기에 있었다.

“공양왕 2년(1390) 9월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도성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 (‘고려사’)

토지개혁으로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새 왕을 지지했기에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정도전의 위민(爲民)사상은 그의 글에 명확히 쓰여 있다.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백성은 빈부나 강약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토지에서의 소출이 모두 국가에 들어갔으므로 나라도 역시 부유하였다.”(‘조선경국전’)

개인의 명리,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근원적인 공부를 추구한 정도전이 도달한 통찰이다. 정도전이 추구한 유학은 혁명적인 시대 가치를 담고 있었다. 양극화 문제가 가장 큰 화두인 오늘날 그의 말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절친한 관계였던 정몽주 세력은 정도전을 이렇게 공격했다. “정도전은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파계(派系)가 명백하지 못한데도 외람되게 높은 관직을 받고 조정에 섞여 있으니, 고신과 녹권을 회수하고 그 죄를 밝게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철저한 토지개혁을 추구했던 정도전은 인간적인 배신감을 아프게 감내하면서도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렇듯 조선의 건국이념과 대외 관계, 정치·경제·사회·법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학을 정립했으며 역사서도 편찬했다. 그의 손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현실에 뿌리내린 정치적 사상과 신념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은 정도전을 경계했다. 그는 명나라로 정도전을 보내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정도전은 사대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나라의 정체와 기강이 흔들리면 백성들이 가장 큰 고통에 처한다는 것을 그는 처절하게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명나라와의 일전도 불사하지 않았고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태평을 누리게 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속히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지금 조선 국왕 이(李)의 문인인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

‘태조실록’에 전하는 명나라 주원장의 말들이다. 그가 얼마나 정도전을 주시하고 두려워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옛일에 외이(外夷), 즉 이민족이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늘어 논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실록은 전한다. 이성계에게 중원의 황제가 되라고 정도전이 권한 것이다. 위화도 회군 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안 된다”라는 이성계의 주장은 당시의 정치논리였던 셈이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조선경국전’)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된다. 정도전의 위민사상은 백성들의 처지를 몸소 체험하고 그들에게 겸손하게 배우면서 단단해졌다. 그의 사상과 강한 신념은 현실에 깊게 뿌리를 내렸기에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죽어야 할 경우에는 죽어야 한다. 의(義)는 육신보다 중요한 것이다.”

참형을 당하고 수백 년간 시대의 금기가 됐던 정도전이 남긴 말이다. 우리가 지금 정도전을 만나는 이유가 바로 이 말에 담겨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