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퇴직연금 시장의 핫이슈 중 하나가 기금형(기업에서 기금을 설립하고, 그 기금에서 퇴직연금제도 운영 전반을 관장하는 것) 도입이다. 기업 내 기금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필요한 제반 요소들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의사결정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
[PENSION PLAN] 퇴직연금 시장의 핫이슈 기금형 퇴직연금의 허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에 직면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한다.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방해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심리학에서는 그 원인으로 휴리스틱을 지목한다. 휴리스틱이란 사람들이 결정을 단순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을 말한다. 의사결정의 단순화는 편리함이라는 효용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빠뜨리는 실수를 범하게 하기도 한다.

휴리스틱으로 인한 의사결정의 오류를 편향(bias)이라고 하는데, 확인함정도 그중 하나다. 확인함정이란 자신의 가설이나 생각을 확인해 주는 증거에는 관대한 반면에, 그렇지 못한 증거는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기는 편향이라 하겠다.

확인함정은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전개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는 장점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의사결정을 내릴 때 중요한 요소를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유·무형의 손실을 초래하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에는 스스로 확인함정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주의를 기울이고 의도적으로 반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 기금형 도입 주장 왜 나왔나
최근 퇴직연금 시장에서 핫이슈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기금형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이런 확인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퇴직연금제도 운영 전반을 적격한 금융회사와 계약을 맺어 아웃소싱 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계약형이라 한다. 이에 반해 기금형은 기업에서 기금을 설립하고, 그 기금에서 퇴직연금제도 운영 전반을 관장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금형은 의사결정의 최고 기구로 이사회를 두고, 이사회를 지원하기 위해 사무국과 소위원회를 둔다. 기금형 도입 주창자들은 기금형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에 노사와 함께 전문가들을 참여시키면 퇴직연금 적립금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퇴직연금 적립금이 자본시장으로 들어올 것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로 호주의 성공 사례를 든다.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직접적인 배경은 지나치게 원리금보장형에 치우친 퇴직연금의 적립금 운용 행태라 할 수 있다. 확정급여(DB)형의 경우 98% 정도가, 확정기여(DC)형은 80% 가까이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고, 그 정도가 점점 심화돼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행 적립금 운용 체제를 점검해 보고 개선안을 찾아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금과 같은 저금리 상황에서 확정금리로 적립금을 운용하면 언뜻 보기에 안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지 않은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정급여형을 운영하는 기업은 법에서 요구하는 적립 수준을 맞추기 위해 추가 부담금을 납입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고,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개인은 목표로 하는 은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할 수 있다.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하는 경우 안전성을 담보할 순 있지만 거기에도 비용이 수반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적립금 운용 보수화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다. 기금형 주창자들은 그 핵심 원인을 퇴직연금의 지배구조, 즉 계약형만 허용돼 있는 법적 현실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호주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거론된다. 호주의 경우 기금형 퇴직연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대부분이 자본시장에서 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기금형만 도입되면 자본시장으로 퇴직연금 자금이 흘러들어 올 것이라는 생각은 논리 비약일 가능성이 크다.


지배구조 개선에 따른 사회적 비용 따져봐야
기금형과 계약형이 함께 허용돼 있는 일본의 사례를 보자. 2012년 일본의 확정급여형 중 기금형의 자산 배분에서 주식과 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3.9%와 27.9%다. 계약형은 어떨까.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자금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을까.

2012년 계약형의 자산 배분에서 주식과 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0.2%와 27.5%다. 거의 차별성이 없다. 이건 무얼 뜻하는가. 퇴직연금의 적립금 운용 행태는 퇴직연금의 지배구조와 함수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퇴직연금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퇴직연금의 적립금 운용 행태는 퇴직연금을 둘러싼 그 나라의 문화, 금융 및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시각, 규제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금형 도입이 기대한 바대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금형 도입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리는 계약형과 기금형 중 선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부여하는 게 좋다는 논리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논리는 타당하다. 하지만 이 논리는 원리금보장형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 지배구조의 선택권 다양화에 수반되는 비용을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회적 비용으로는 제도 운영 비용의 증가, 퇴직연금사업자의 사업성 악화 등을 들 수 있다. 기금형이 계약형에 비해 제도 운영 및 관리에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기금형 주창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기금형을 운영하는 데 인력 확보, 시스템 구축 등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사업자의 사업성 악화도 무시하지 못 할 변수다. 수익성 악화로 대형사까지 퇴직연금 사업을 축소하는 곳이 등장하고 있는 판국에 기금형의 도입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손해를 보면서까지 퇴직연금 역량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성과가 상당 부분 사장될 것이다. 이는 분명 초고령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나라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사업자의 비즈니스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지 않은 지배구조 개선 주장은 자칫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운용 성과를 지향하는 좋은 지배구조의 목적’에 위배될 수 있다. 그렇다고 퇴직연금의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더라도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따지고, 대안을 충분히 검토해 최선의 개선 방안을 찾자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고령화시대에 퇴직연금은 중요한 사회적 인프라다. 기금형 도입은 이런 사회적 인프라에 지각변동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처럼 중요한 의사결정 사안을 확인함정에 빠져 서둘러 추진하다 보면,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필자도 기금형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기금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필요한 제반 요소들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잘 어울리는 요즘의 퇴직연금 시장이다. 기금형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확인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비용과 대안을 함께 검토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