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혹은 드림위버, 정연두 작가
정연두 작가가 좋았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당연히 작품에 대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겠지만, 솔직히 그의 작품을 실물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좋았다. 유치한 고백이지만 ‘정연두’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색이 좋았고, 그 파릇함에 끌렸다. 초록을 향한 찬란한 봄 같은 느낌이랄까. 작품에서 받은 인상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랬다. 그의 작품에는 ‘온기’가 있었다.![[ARTIST]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진 인터내셔널한 메시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4326.1.jpg)
국내에서 열리는 6년 만의 개인전. 그것도 그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를 한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점에서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베니스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 국제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2012년에는 미국 아트 앤 옥션(Art+Auction)이 선정한 ‘가장 소장 가치 있는 50인의 작가’에 이름을 올리는 등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아니던가. 2007년 최연소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고,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에서의 이력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다.

‘크레용팝’에서 ‘지옥의 문’까지 가벼움과 무거움을 넘나들다
짐작했겠지만 이렇듯 정 작가의 예술 세계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기조는 유명해지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어쩌면 가장 화려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작업의 규모와 던지는 화두, 그리고 대표작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까지.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회고전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회고전이란 게 작가의 모든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장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저처럼 앞을 보고 달려가는 작가 입장에선 과거를 돌아보는 전시만을 하기 싫은 것도 있었어요. 현재 진행형의 삶과 고민을 보여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했고, 그 결과가 ‘도시 속 군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죠. 그 프레임을 정해 두고 새로운 작품과 이전 작품을 선정해 하나의 스펙트럼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제가 지향하는 바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이끌려 왔는가를 보여 주고자 했어요.”
회고전 성격을 띠긴 하지만 이번에 새로 선보인 두 편의 신작 ‘베르길리우스의 통로’와 ‘크레용팝 스페셜’은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라는 전시 주제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며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통로’는 이번 전시 공간인 플라토 미술관 ‘글래스 파빌리온’에 상설 전시돼 있는 로댕의 ‘지옥의 문’을 직접적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알다시피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을 청동으로 조각한 작품으로 단테와 그의 스승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해 처절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는 이야기. ‘로댕을 위한 공간’에 전시를 하자니 장소 자체가 고민이었다. 또 하나, 로댕이 40년을 투자해 죽음과 지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 앞에서 자칫하면 현대미술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옥의 문’을 포용한 무형의 작품을 만들기로 한 정 작가는 일 년간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246개의 인물상을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포즈를 재현하고 3D로 만들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가상의 조각으로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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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작업의 영감은 일본에서 만난 한 맹인 안마사로부터 시작됐어요. 지난해 2월 이바라키 현 미토에 한 달간 머물 당시, 미술관 옆 마사지 숍을 운영하는 시각 장애인이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죠. 그분은 굉장히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셔터를 돌리고 사진을 찍더군요.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그런 식으로 자기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고, 거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신을 갖고 있는 미토 지역의 특성이 맞물리면서 ‘보이고 보이지 않는 관계’가 흥미롭게 다가왔죠. 시각을 표현하는 은유라고 해야 할까요. 3D 기기를 착용한 사람은 맹인처럼 다른 걸 볼 수 없게 되지만,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제 작품을 보기 힘들고 ‘지옥의 문’을 보겠죠.”

“크레용팝의 팬 50명과 카카오톡 단체 그룹방을 만들어 오랫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크레용팝이 유명해지기 전, 지역 행사를 다닐 때부터 현장을 함께 하며 충성스러운 후원자를 자청해 온 ‘팝저씨’들의 모습 자체가 재밌기도 했지만 그들의 외침에서 중년 아저씨들의 외로움 혹은 해방감도 느껴졌어요. 그런가 하면 크레용팝을 모르는 일본 큐레이터는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저씨들의 외침이 지금은 걸 그룹을 향해 있지만, 그게 사회를 향해 나온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라고 말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보는 이들이 완성해 가는 일상의 예술을 추구하다
정 작가는 이렇듯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관객들에 의해 읽히고 해석되며 작품이 완성돼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꿈과 소망에서 누군가는 희망을 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읽는 것처럼 낙관론과 비관론을 모두 담고 있는 포용성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하나의 가치인 것이다. 그가 작품을 다룰 때 밝은 비전 혹은 어두운 단면만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균형감각을 갖고 많은 과정과 이야기를 묻어두려고 하는 건 그래서다.

“제 작업에 아마추어적인 게 많아서 더 그럴 겁니다. 그런 면에서 ‘상록타워’는 미숙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죠.(웃음) 저는 사진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작품을 보면 거실 유리창에 반사된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해요. 다만 카메라의 미숙함은 있지만,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하고 남의 집에 침범해 세팅하고 촬영하는 등 일련의 과정엔 예술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들어 있죠. ‘식스 포인츠’만 해도 그 정도 규모의 애니메이션은 여러 명이 단기간에 만드는 건데 저는 장시간을 투자해 혼자 꾸역꾸역 틈틈이 표현해 냈죠. 그 과정들이 프로페셔널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요.”
조소를 전공한 정 작가가 작품의 효과적 표현을 위해 사진과 동영상, 3D와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했어요. ‘네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냐’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긴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말이 와 닿아요. 아마도 제가 사진을 전공했더라면 아는 지식, 즉 사진으로만 이야기를 풀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 작업실 뒤에 관악산이 있고 그 너머는 경기도예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극동이라고 부르는데 전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아니잖아요. 저는 그 극동에서도 남쪽 경계선에서 작업하고 있지만, 지금 시대는 그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죠. 지난해만 해도 저는 호주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 30번 정도의 전시를 했는데, 대부분은 이메일로 모든 일이 진행돼요. 전 비행기 타고 날아가 오프닝을 하면 되는 거예요. 과거엔 생각하지 못 했던 현실이죠. 작품도 그런 것 같아요. 굳이 인터내셔널이라는 문맥을 담지 않아도 춤, 집, 사람의 꿈, 도시 속의 외로움, 팬덤, 죽음 앞의 인간의 모습 등은 문화적 배경에 대한 관객의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사회적 문맥에 따라 반응은 정말 달라요. 보는 사람에 의해 각각 다른 이야기가 완성되는 거죠.”
다시, 그의 이름으로 돌아와 ‘정연두’라는 이름에서 받았던 따뜻함은 실제 모습에서도 그대로였다. “내게 있어 일상은 그냥 일상이라기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예술로 포함시키려는 노력”이라는, “예술이란 높은 데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평범한 무언가를 내가 느끼는 깊이로 끌어내는 것”이라는 그의 가치관 자체에 이미 온기가 포함돼 있었으니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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