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바라본 정도전
요즘 TV 속에서 그려지는 인물 정도전은 그야말로 영웅이다. 영웅적 행동을 일삼는 정도전의 모습은 팍팍한 현실마저 잊게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펜 끝에서 탄생한 모습일 뿐 역사 속 정도전은 일면 보수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을 열광케 하는 TV 속 정도전과 우리가 몰랐던 그의 민낯까지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읽어 봤다.![[SPECIAL REPORT] 개혁적 풍운아 vs 타협적 보수의 양면성](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4378.1.jpg)
사극은 말 그대로 드라마의 배경을 역사상의 특정 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역사상 실존 인물을 등장인물로 내세울 뿐 극의 내용은 작가적 상상력에 따른 그럴듯한 허구다. 물론 누가 언제 활약하고, 언제 위기에 처하고, 언제 죽는지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끌어다 쓰지만, 그런 개개의 사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당한 공간(간격)은 거의 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운다. 따라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 몇몇 사극이 크게 유행한다면, 그 시대극의 내용이 정말 사실이냐고 묻기보다는 “왜 그런 사극이 지금 이 시기에 유행하는가”라고 질문을 바꾸는 편이 보다 의미 있다. 사극 ‘정도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드라마가 간과한 정도전의 보수성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개창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학자는 조선왕조의 설계 과정에서 이성계보다 오히려 정도전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서 그를 한껏 추켜세운다. 각종 교과서에서도 ‘불씨잡변’이나 ‘조선경국전’을 거론하며 정도전을 부각시킨다. 정도전에 대한 이런 평가의 배후에는 고려 말의 혼탁한 사회에서 정도전이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개혁적이었고, 자신의 개혁 아이디어를 정치 현실에서 타협 없이 그대로 실천하려 경주한 선의의 인물이었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회 개혁을 외치고 그 실현을 위해 직접 좌충우돌하는 개혁적 풍운아라면, 시공을 넘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주인공 정도전의 언행을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그리는 드라마일 뿐,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정도전이 보여 준 개혁의 실상과는 적지 않은 괴리가 있다. 그도 한 인간인지라 개혁성 못지않은 보수성도 함께 갖고 있었는데, 건국 주체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토지개혁 논쟁을 보면 정도전의 양면성을 일견할 수 있다.
흔히 조선왕조의 설계자는 정도전이고 조선의 새로운 토지제도가 과전법이라고 알려지다 보니, 과전법이 마치 처음부터 정도전의 아이디어였던 것처럼 무심코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도전이 애초에 구상한 새로운 토지제도는 과전법이 아니라 일종의 정전(井田)제였다. 정전제는 넓은 의미에서 공전(公田)제의 일종으로, 모든 백성에게 국가에서 일정한 경작지를 지급하는 제도다. 이런 조치는 기존의 사전을 모두 몰수해야 가능하므로, 정도전의 정전제 주장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개혁안이자 백성들이 먹고 살 터전을 국가가 지급하자는 획기적인 민생안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알려진 정도전도 자신의 정전제 구상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건국 세력 내부에서도 대다수가 반대했기 때문인데, 좌충우돌 개혁가인 정도전도 토지문제에서만큼은 자기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경주하기보다는 손쉬운 타협의 길을 택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도전이 엄청난 영웅이라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기도 하다는 양면성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토지와 함께 부의 주요 척도인 노비 문제로 눈길을 돌리면, 정도전의 실체를 더욱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부의 척도는 무조건 토지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회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 부의 제일 척도는 가변적이었다. 왜냐하면 토지의 비옥도 외에도 노비(노동력)의 다과가 생산력의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노비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했다. 고려 전기까지도 노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무신정권(1170~1270)과 몽골의 간섭(1270~1350)으로 인해 국가의 공적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된 고려 후기부터 노비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증가 추세는 조선왕조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조선 초기(15세기)에는 노비 인구가 약 30%에 달했고, 조선 중기(16~17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40%까지 육박했다.
노비 인구 증가의 사회경제적 요인은 사실 간단하다. 당시 사회경제 구조를 고려할 때, 토지보다는 노동력 확보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농장을 경작하고 운영하는 일이나 새로운 토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개간사업에 값싼 노동력은 많을수록 좋았다. 요컨대, 정도전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부의 제일 척도가 토지보다는 노비였던 것이다.
모계 쪽으로 신분상의 약점을 지닌 정도전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그다지 큰 재산가가 아니었다. 장관을 지낸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노비는 대여섯 명으로, 당시 사회 형편상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주변의 또래들에 비해서는 평균 이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으나, 그가 이성계를 후원하면서 약 10년 동안 일국의 권력을 쥐락펴락한 점을 고려하면, 그의 노비 소유가 보통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권력을 잡기 전이나 후에도 정도전은 노비 혁파를 거론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서 정도전의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 개혁을 외친 무리 중에서는 정도전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졌지만, 그 자신 또한 고려~조선사회의 기득권층으로서 자신의 기득권, 특히 경제적 기반에 손해가 없는 범위 안에서 개혁을 외친 것이다.
영웅이 필요한 팍팍한 현실, 정도전이 주는 대리만족
TV 속에서 정도전은 꿋꿋한 개혁가다.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그것을 극복하고 개혁의 뜻을 이루는 초인이다. 지난해에 크게 히트한 영화 ‘광해’의 화두는 민생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다면 왜 최근에 개혁과 민생을 화두로 삼은 사극이 유행할까. 아무래도 주요 시청자 층인 40~60대 중장년층의 현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창 돈이 필요한 40대 중반부터 퇴직을 강요당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구조에서 많은 장삼이사들은 숨이 막힌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용할 나이건만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서는 한낱 낙엽일 뿐이다. 가장으로서 민생의 짐은 잔뜩 지고 있으나 그 짐을 분담할 사회적 제도도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영웅을 갈망한다.
현재 중장년층은 대개 산업화 시대의 덕을 본 세대다. 국가 사회의 전체 파이가 계속해서 커지던 시기에 취직하고 돈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고 집을 장만한 산업화 세대는 자신의 성공을 자수성가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계를 일으킨 동력을 자기의 노력으로만 이해하니, 자신의 몰락도 당연히 사회의 구조적인 면보다는 자기의 책임으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설사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인식이 미치더라도 그것을 집단적으로 직접 표출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위험 부담이 따른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영웅은 사극의 탈을 쓸 필요가 있다. 사극에서는 아무리 현실을 비판해도 별다른 위험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사회구조에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표출할 길이 녹녹지 않은 현실. 자신의 곤경을 자기 책임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의식 구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 땅의 중장년층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홀연히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인왕산 자락과 여의도에 등장해서 무엇인가 요술을 부려 주길 기대한다.
시청자들은 그런 영웅적 행동을 스스로 할 수 없는 팍팍한 현실에 갇힌 채, TV 화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푼다. 이런 관계는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차라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거래이기도 하다.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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