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의 자유인, 피아니스트 박종훈

피아노, 참 쉽고도 매력적인 악기다. 전설적인 지휘자 중에 유독 피아니스트들이 많다는 점을 떠올리면 위대하기까지 하다. 여전히 클래식이 어려운 장르라면, 피아노만큼 친근한 방식이 또 있을까. 머니는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음악적인 실력과 음악 외적인 호기심까지 충만한 피아니스트 박종훈이 그 첫 주인공이다.
[BREAK FOR MUSIC] 내 방식대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삶
TV 드라마 때문에 만난 건 아닌데 드라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편 드라마치고 높은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니고 있는 JTBC ‘밀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터. 피아니스트 신지호, 진보라 등과 함께 ‘밀회’에 출연 중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박종훈이 그 주인공이다. 극 초반 실제 피아니스트들의 출연 자체로 눈길을 끌더니, 연상 연하 커플의 아슬아슬 로맨스와 사학 비리라는 극단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리얼리티를 살리고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을 들려주며 ‘신의 한 수’라는 평을 듣고 있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인 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 조인서로 분한 박종훈은 이선재(유아인 분)의 라이벌이 되는 지민우(신지호 분)를 양성한 스승으로, 동료 교수인 강준형(박혁권 분)이 경계하는 대상. 극 중 피아노 하나밖에 모르는 실력 있고 덕망까지 갖춘 교수로 분해 진짜 교수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는 실제 모습과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말투는 딱 실제 그대로인데 가발을 눌러 쓴 모습은 어쩐지 어색하고, 피아노가 삶인 건 맞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적성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첫 드라마인데 정말 어려워요. 몇 줄 안 되는 대사도 지독하게 안 외워지더라고요. 앞으로 비중이 늘어나면서 신(scene)도 많아지는데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도 새로운 도전이 재밌고 즐거워요. 음악과도 분명 일맥상통하는 게 있거든요.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게 그렇고 다른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도 그렇죠. 이번 경험이 연주를 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현장에서 배우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큐’ 사인 들어가기 전 장소를 옮기면서 벌써 극 중 인물로 변해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배우는 게 많아요.”
[BREAK FOR MUSIC] 내 방식대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삶
피아노가 평생의 삶인 세계적 연주자의 ‘클래식 대중화’ 노력
반대로 배우들에게 그는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 배움의 대상이다. 아무리 연기로 커버한다고 해도 평생 피아노를 쳐 온 그를 따라갈 수는 없는 일. 기획 단계부터 드라마에 참여해 온 그는 배우들에게 아주 사소한 것까지 조언하고 도움을 주며 완성도에 기여하고 있다. 피아노를 중심에 두고 피아노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장르의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급기야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게 된 건, 피아니스트로서의 오랜 과제이자 숙제인 ‘클래식의 대중화’ 그 연장선의 의미가 컸다. 정통 클래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뉴에이지부터 재즈, 탱고 등 음악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해설이 있는 클래식을 비롯해 콘서트 사회자, 라디오 디제이(DJ), 음악 관련 다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여러 길을 모색하고 실천해 온 그였다. 그 과정에서 때론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결코 신경 쓰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드라마에 삽입된 클래식을 찾아보는 등 음악 자체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고 하더군요. 반가운 일이죠. 그동안 클래식을 다룬 드라마들이 없진 않았지만 당시에 관심이 일다가도 드라마가 끝나면 함께 사그라지는 등 일시적이었거든요. 그게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더 좋아지겠죠.”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연주 활동을 했던 지난 십몇 년. 그는 장르도 장소도 가리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의 감동과 즐거움을 주고자 했다. 클래식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지방에서 의도적으로 공연을 많이 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더 클래식의 대중화에 목말랐던 데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보고 느낀 것 때문이었다.
[BREAK FOR MUSIC] 내 방식대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삶
“10년 전 나주에서 독주회를 했는데 클래식 연주자가 와서 독주회를 한 게 제가 처음이었대요. 공연을 하러 갔더니 육교에 공연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경축’이라고 써 놨더라고요.(웃음)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중간에 떠들기도 하고 악장 사이에 박수치는 것도 기본인데 그 순수함과 호기심이 참 좋았어요. 이렇게 누군가에게 특별한 경험인 클래식 공연이 유럽에선 아주 일상적이잖아요. 공연 포스터에 연주자, 작곡가, 곡 이름 딱 세 줄만 써 놔도 그거 보고 듣고 싶어서 찾아오는 거죠. 한번은 토마스 만이 작업했던 산 속의 작은 집에서 독주회를 했는데도 산길을 한 명씩 걸어 올라와 공연장이 꽉 찰 정도였어요. 바꿔 생각하면 유럽 사람들은 자기네 음악이잖아요. 클래식은 태생이 귀족적이기도 하고요. 다른 세계의 음악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왔다는 것만 해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람들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지만 알고 보면 그는 더없이 화려한 이력을 가진 존재감 충만한 아티스트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던 그는 이미 신동이고 천재였다. 그의 나이 열다섯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그것이 공식적인 데뷔 기록이 됐고, 대학 재학 중이던 1991년에는 서울시 청소년교향악단과 함께 초청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후 2000년 이탈리아 산레모 클래식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우승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고, 이탈리아에서 먼저 공연과 데뷔 앨범 등을 통해 유명해졌다. 줄리어드 스쿨 음악원을 거쳐 전설적인 거장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에게 사사했던 그는 프란츠 리스트 스페셜리스트였던 스승을 둔 제자답게 2009년 까다롭기로 유명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전곡 연주를 국내 최초로 성공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데뷔 30주년, ‘박종훈다운 것’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시작
클래식을 잘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주눅 들기 딱 좋은 히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얼마 전 공식 무대를 기점으로 한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 ‘더 피아니스트(The Pianist)’를 발매한 것도 “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모르고 있었는데 세어 보니 30년이더군요. 사실 특별한 감정이 없어요. 어떤 일을 시작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데 몇 주년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는 결혼기념일도 별로 챙기지 않아요. 일부러 의미를 두는 게 오히려 더 가식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다만 음반을 내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기는 했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아요. 음반에도 글을 남겼듯이 이제 시작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연습이었고, 지금부터가 진짜죠.”

음악을 시작한 게 언젠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평생을 해 온 사람의 고백치곤 너무 겸손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해 왔지만 ‘이런 게 박종훈이다’ 하는 게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타자 입장에서 보는 박종훈과 스스로의 평가는 그렇게 엇갈렸다.
[BREAK FOR MUSIC] 내 방식대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삶
“많은 일을 하는 사람, 저에 대한 보통의 시선은 그렇죠. 근데 그건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엔지니어가 돼 직접 녹음을 하고 심지어 콘서트를 할 때 선곡이며 편곡, 오케스트라 총보까지 만들기도 했는데, 더 잘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그랬던 게 커요. 물론 그러다 보니 고달프기는 해요. 음악적으로 힘든 건 둘째치고 강도가 센 노동이거든요.”

그렇지만 한 번도 지금의 길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렵게 택한 길이었다. 피아노보다 먼저 바이올린을 시작했던 그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꿈꿨지만 삼형제 중 맏이인 그가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음악은 취미로 해야겠다며 포기를 했건만,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선언했고, 이후 부모님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예술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유전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예술을 너무 사랑하고 끼가 다분하세요. 제가 음악을 많이 듣게 된 것도 어릴 때부터 집안에 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고요. 지금도 부모님 두 분이 춤을 추세요. 댄스스포츠를 하시는데 콩쿠르에도 나가시고 일본에서 하는 대회에도 참가할 정도로 열정적이죠. 아버지는 예술 관련 모든 분야를 다 섭렵하셨는데 심지어 연극에 출연한 적도 있을 정도예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둘째와, 미술을 전공하고 지금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막내까지 온 집안에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가운데, 아내인 치하루 아이자와 역시 유명 피아니스트이고 아홉 살 된 딸아이도 음악과 미술에 소질을 보이는 등 온 가족이 예술이라는 코드로 똘똘 뭉쳐 있다. 동생과 협연을 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아내는 오랜 친구이자 음악적 동료다. 역시 라자르 베르만의 제자였던 아내와는 ‘듀오 비비드’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두 장의 앨범을 내고 연주회를 하는 등 부부의 교감을 피아노 위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와 유아인이 협연했던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는 부부가 자주 연주하는 대표곡 중 하나. 드라마 속 장면을 떠올리니 피아니스트 부부가 사는 광경은 어떨까 궁금했다.

“음악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잘 안 해요.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의견이 달라서 많이 싸웠거든요. 부부로 사는 것과 함께 연주하고 녹음하는 건 많이 달라요. 순탄하게 이끌어 가는 건 동료들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죠. 가까운 사이라 자기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아 감정 조절이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런 감정으로 사랑스러운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건 정말 괴로움이죠.(웃음)”

동료 입장에서 바라본 아내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야망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는 그는 정작 자신의 야망에 대해서는 야망이란 단어 대신 ‘꿈’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남긴 것들이 오래 오래 남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인정받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클래식 대중화’의 길은 여전히 그의 몫으로 남는다. 올 11월부터 첼리스트 송영훈의 뒤를 이어 예술의 전당 ‘11시 콘서트’를 맡게 된 것도 그 행보 중 하나.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라는 클래식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보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은 그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서범세 기자, 루비스폴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