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healing

히로시마는 가장 일본다운 여행지다. 한적한 어촌 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고양이가 한가롭게 뒤를 따르고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환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일상의 피곤에 지친 몸을 편안히 누일 수 있는 고풍스런 료칸도 있다. 물론 맛있는 음식 탐험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TRAVEL BUCKET LIST] 산책, 온천, 그리고 맛있는 음식
히로시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닐까.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인류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버섯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솟아올랐고 7만여 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져 갔다. 지금도 당시 피폭을 입은 건물은 ‘원폭돔’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히로시마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바로 이 원폭돔으로 불리는, 뼈만 남은 앙상한 건물이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단언컨대, 일본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행지이자 휴양 도시다.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천과 느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원,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도시가 바로 히로시마다. 물론 일본의 역사를 응축한 문화유산도 존재한다. 히로시마로 떠나는 여행은 ‘힐링’, ‘웰빙’을 테마로 잡아도 좋다.


일본 제일 경승지 도모노우라
히로시마 여행의 첫걸음은 도모노우라라는 작은 마을이다. 세토 내해(內海)에 자리한다. 일본 혼슈, 시코쿠, 규슈 지역으로 에워싸인 세토 내해는 6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일본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경승지다. 히로시마는 밀물과 썰물이 교류하는 지역이라 항구 도시로도 번창했는데, 이 중에서도 도모노우라는 18세기 조선통신사가 교토로 가던 중 며칠을 머무는 정례 코스였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물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 신사.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물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 신사.
통신사의 숙소 역할을 한 것은 후쿠젠지라는 절이었다. 일본 측은 이곳에 영빈관을 지어 숙소로 이용하게 했다. 영빈관은 앞바다에 작은 섬들이 떠 있고 저 멀리에는 시코쿠가 보이는 특별한 경치를 자랑한다. 1711년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은 이를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 일본 최고의 경치)’이라는 말로 찬사를 보냈고, 영빈관에는 이방언의 글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목각한 액자가 걸려 있었다. 1748년 통신사에서는 명필이던 홍경해가 가로 길이 2m에 이르는 큰 종이를 준비해 ‘다이쵸로(對潮樓)’라는 이름을 영빈관에 지어주었다. 이 글 또한 묵적을 선명하게 남기며 다이쵸로에 걸려 있다.

사카모토 료마 역시 한동안 도모노우라에서 기거했다. ‘메이지유신의 풍운아’로 불리는 그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자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묵었던 방과 식사를 했던 식당 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도모노우라가 최근 다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덕분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마을에서 6개월 이상 머물며 마을의 풍광을 상세하게 담았다. 단골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바닷가를 천천히 거닐며 작품을 구상했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2008년 개봉한 ‘벼랑 위의 포뇨’다. ‘인어공주’의 해피엔딩 버전쯤 되는 이 영화는 그해 일본 최고 흥행 수입은 물론 일본 역대 영화 흥행 10위권에 드는 성공을 거뒀다. 영화가 상영된 이후 도모노우라를 찾는 관광객이 급증한 것은 물론이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거대한 도리이.
이쓰쿠시마 신사의 거대한 도리이.
동네 끝 선창에는 150년이 넘은 등대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잘생긴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다. 그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일본 제일 경승지에서 마시는 커피는 달콤하고 향긋했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너머에서는 금방이라도 포뇨가 뛰어오를 것 같았다.


느긋한 산책이 어울리는 도시
히로시마는 아기자기한 도시다. 아직도 기와집이 빼곡한 옛날 골목이 남아 있고 그 골목을 조그만 고양이들이 꼬리를 치며 돌아다닌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 바로 히로시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찻집을 만나면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 녹차 한 잔 마시며 오후를 보내면 좋은 그런 도시.

히로시마 동쪽의 작은 도시인 오노미치는 예쁜 골목길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이 도시에는 절이 많다. 예전에 상업 도시로 번창할 때 부유한 상인들이 자신들의 뱃길을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기도하며 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80여 개의 사찰이 남아 있는데 일본의 고대 문화를 이끈 쇼토쿠 태자가 세운 조도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절도 볼 만하지만 사실 더 좋은 건 절로 향하는 길이다. 길은 언덕을 따라 구불거리며 올라간다. 나무도 울창하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짙은 숲 내음이 가슴 속으로 스민다. 잔재미도 있다. 소노야마 순지라는 화가가 어느 날부터 길섶에 고양이를 그린 돌멩이를 놓아두기 시작했다. 그 돌은 하나둘씩 늘어났고 지금은 100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돌멩이에 그려진 고양이의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활짝 웃는 고양이도 있고 살짝 심통이 난 고양이도 있다. 모두가 제각각 귀엽다. 마음에 드는 고양이를 찾으며 사진도 찍으면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모노우라의 정겨운 골목길.
도모노우라의 정겨운 골목길.
원폭돔과 함께 히로시마를 대표하는 풍경은 미야지마에 있다. ‘신발 밑창에 사슴 똥을 묻히지 않고는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사슴이 많은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야지마는 일본인들이 가장 찾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다.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嚴島)신사는 히로시마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바다 위에 지어진 신사인데, 만조 때 바닷물이 가득 차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쓰쿠시마는 해신을 섬기는 신사로 용궁을 재현하기 위해 물 위에 지었다고 한다. 헤이안시대 귀족들의 저택 양식으로 지어진 혼샤(本社)를 중심으로 21개의 건물이 273m의 긴 회랑으로 연결돼 있으며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압권은 도리이(나무로 만든 신사의 정문)다. 이를 보기 위해 매년 수십만 명의 서양인들이 일본을 찾는다. 높이 16.8m, 폭 24m, 4층 건물 높이다.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에 입을 다물 수 없다.
후쿠젠지 영빈관에서 바라 본 풍경.
후쿠젠지 영빈관에서 바라 본 풍경.
온천과 미식의 도시
히로시마 하면 굴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히로시마는 일본 최대의 굴 양식장을 갖춘 곳이다. 미야지마로 가는 길에는 굴 요리로 유명한 가키야라는 식당이 있다. ‘줄 서서 먹는 맛집’ 랭킹에서 2위를 했다고 광고하는 집이다. 명성대로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다. 20여 분을 기다려 드디어 굴 정식을 주문했다. 커다란 굴구이와 굴튀김, 굴밥이 쟁반 위에 올려져 함께 나왔다. 여기에 굴 요리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와인 샤블리를 곁들였다. 굴 하나를 입에 물고 샤블리 한 모금을 머금었다. 문득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올랐다. 그는 굴튀김에 생맥주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사람. 굴튀김을 먹고 가게 문을 나서면 굴의 조용한 격려가 어깨에 느껴진다고 썼던가. 조용한 격려까지는 아니었지만 히로시마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폭돔.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폭돔.
히로시마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와소라는 료칸에서 보냈다. 미야지마에 자리하고 있다. 1854년에 문을 열었다. 황족, 작가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방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운치 있는 온천이 꼭 한번 경험해 볼 만하다. 노천탕에서 바라보는 계곡이 멋스럽다.
오노미치 산책길과 고양이가 그려진 돌멩이.
오노미치 산책길과 고양이가 그려진 돌멩이.
방도, 온천도, 료칸을 둘러싼 풍경도 좋지만 이 료칸의 하이라이트는 요리다. 히로시마에서 나는 재료만을 사용해 내놓는 가이세키가 압권이다. 교토 출신 요리장이 솜씨를 뽐낸다. 생선과 초밥, 고기 등 화려한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알고 보니 이 료칸은 음식으로 ‘미슐랭’ 원스타를 받았다고 한다. 료칸이 미슐랭 스타를 받는 일은 매우 드문데, 일본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도모노우라에서는 ‘벼랑 위의 포뇨’ 관련 기념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도모노우라에서는 ‘벼랑 위의 포뇨’ 관련 기념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가이세키를 배부르게 먹고 노천탕에서 몸을 녹인 후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귓전으로 잘박잘박 밀물 드는 소리가 찰랑거렸다. 히로시마에서의 더없이 편안한 밤이었다.
미야지마에는 사슴이 사람보다 더 흔하다.
미야지마에는 사슴이 사람보다 더 흔하다.
Plus Info.
[TRAVEL BUCKET LIST] 산책, 온천, 그리고 맛있는 음식
인천에서 히로시마까지 매일 아시아나항공이 운항한다. 1시간 20분 소요. 다니키치우에노(www. anagomeshi.com)는 유명한 장어 덮밥집. 4대째 대를 잇고 있다. 음식점 이름은 창업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평일에는 시라야키와 밑반찬이 곁들여진 ‘아나고메시 정식’만 제공된다. 금요일과 주말에는 아나고가 마야키메시를 중심으로 만든 창작 일본 요리 코스와 ‘아나고 츠쿠시 코스’를 먹을 수 있다. 가키야(www.kaki-ya.jp)는 미야지마의 유일한 굴 전문점이다. 자연산만 취급한다. 간판 메뉴인 야키카키(굴구이)는 꼭 주문해야 하는 요리다. 강력한 화력으로 한꺼번에 구워 낸 굴 요리는 살이 통통하며 단맛이 강하다. 히로시마 전통 술과 샴페인, 화이트 와인과 곁들여서 먹으면 좋다. 이와소(www.iwaso.com)는 1854년에 창업한 료칸이다. 객실과 온천, 요리 모든 것이 훌륭하다. 니시야마 별관(http://www.nishiyama-b.jp)은 세토 내해에 접하고 있는 넓은 부지에 9개의 별채가 있다. 1943년에 창업한 이래로 조금씩 건물을 증설해 시대에 따라 각각 양식이 다른데, 운치 있는 볏짚 지붕의 ‘와라노이에’가 특히 인기가 많다. 가이세키는 근해산 어패류를 이용한 요리를 주로 낸다. 오후테이(http://www.ofutei.com) 료칸의 객실은 다다미 10조 또는 12.5조에 넓은 툇마루가 있는 일본식 방이 기본이다. 일부 객실을 제외하고는 커다란 한 장의 유리를 사용한 오션뷰로 돼 있다. 세토 내해의 평온한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왕래하는 배를 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노천 목욕탕이 있는 대욕장은 당일치기 온천으로도 이용 가능하다. 옥상에서는 프리미엄층이 이용하는 손님 전용의 노천 목욕탕이 있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노천욕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