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박사 ‘인생 내공’

지난 달 ‘book we attend’의 인터뷰이였던 ‘놀공발전소’ 피터 리 대표는 인생의 롤 모델을 묻는 질문에 ‘이시형 박사’라고 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진정한 청춘’이고, 그런 면에서 이 박사는 청춘 중 청춘이기 때문. 공교롭게도 이번엔 이 박사를 만났다. 칠십 몇 번째쯤 되는 그의 저서 ‘인생 내공’을 들고서.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세로토닌 문화원에서 만난 이시형 박사는 문인화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뒷벽에 그림 한 번 걸려본 적이 없었던 게 ‘한’이 됐던 이 박사는 죽기 전에 못했던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들을 모았고 그렇게 1년 여 전부터 문인화를 배우고 있노라 했다. 지난해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옥션에 작품을 내놓아 꽤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고, 올해는 전시회도 예정돼 있단다. 슬쩍 그의 작품을 엿보았다. 유려하다기보다 오히려 소박한 쪽에 가까운 먹물 그림 옆에 쓰인 짧은 글이 인상적이다. ‘큰 파도에도 큰 배는 뜬다’, ‘여울물은 작은 돌에 부딪쳐도 시끄럽다’ 등. 행간을 읽으니 아닌 게 아니라 인생 내공이 보인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엔 ‘인생 내공’(위즈덤하우스)이란 제목만 보고서는 ‘스킵’할 뻔 했다. 뭐, 인생을 사는 데 내공이 필요하다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쯤이겠거니 했다. 독한 제목에 길들여진 탓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눈길을 끈 건 8할이, 아니 9할 이상이 저자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설명이 필요 없는 ‘영원한 현역’이자, 어떤 면에선 ‘진정한 청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지만, 단언컨대 단순히 이름값이나 유명세 때문은 아니었다.


평생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몇 가지 절대적 이유
우리나라 나이로 80이 넘은 나이, 스스로 30년 젊게 살고 있다며 “이시형처럼 살아라”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는 평생에 걸쳐 온몸으로 인생 내공을 쌓아온 이가 아니던가. 허니 그의 내공 비법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더, 책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100세 시대’니 ‘인생 후반’이니 ‘은퇴’니 하는 식상한 단어들이 그저 그런 뻔함으로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뇌과학자인 이 박사와 문화인류학자인 이희수 교수가 합심해 치열한 고민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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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내공’을 통해 하고 싶었던 핵심적인 말은 무엇인가요.
“의학적 정의로 보면, 40대가 지나면서 건강상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했을 때 남자는 90세, 여자는 100세까지 산다고 봅니다. 이러다 재수 없으면 120세까지 살 수도 있는 거예요. 지난해 통계로 100세 된 노인이 1년에 1200명 불어났다고 해요. 기하급수적인 수치죠. 이젠 100세 노인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닌 시대입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인생 후반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당하면 하겠지’, ‘설마 내가’ 하고 생각하는데 턱없는 낙천주의 기질 탓이에요. 헌데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치열하게 살았던 전반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한 법이에요. 예를 들어, 요즘 인생 전반이 끝나고 제일 많이 하는 게 음식점이나 프랜차이즈 창업이죠. 그게 제일 쉬우니까요. 그런데 통계를 보면 3년 내 98%가 망한다고 해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들고, 그게 왜일까요. 바로 내공이 없기 때문이지요. 음식점을 창업하려면 인생 전반에 몸담고 있을 때 최소한 10년은 준비했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저축도 시원치 않고 연금도 어찌 될지 믿을 수가 없어요. 달콤한 망상에 젖을 것이 아니라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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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보며 안타까움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그럼요. 당장 저만 해도 그래요. 명색이 건강과 장수를 공부한 의사인데, 50세가 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80세가 넘도록 인터뷰를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요.(웃음) 제 자신이 이럴진대 일반인들이 제대로 준비를 했겠습니까. 제 친구들 중에도 많아요.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명성 있던 친구들이 그 삶이 끝나고 나니 후반이 너무 초라한 겁니다. 친구들을 만나도 차 한 잔 못 사는 친구들이 많아요.”


100세 시대 준비라고 하면 보통은 경제적인 준비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게 중요하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돈보다 다른 준비가 중요해요. 제 경험에 비춰 인생 후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한 ‘삶의 5대 목표’는 이렇습니다. 첫째, 100세까지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어야 되고, 둘째, 100세까지 치매에 안 걸려야 되고, 셋째, 그러려면 100세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어야 하고, 넷째, 100세까지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섯째, 100세까지 우아하고 섹시하게 멋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목표를 위해 가야 해요.”


‘평생 현역’의 대표주자시죠.
“노력의 결과지요. 제 주변 사람들이 저를 보면 ‘다음엔 또 뭘 하시렵니까’ 하고 말할 정도예요.(웃음) 평생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의미가 큽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정하게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야 정신적으로 덜 위축되는 법이에요. 즉 평생 현역이 되라고 하는 건 정신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현역일 수만 있다면 그게 무슨 일이든 상관없어요. 또 현역으로 살면 스스로 자부심과 긍지가 커지지요. 저는 지금껏 지하철을 공짜로 타본 적이 없어요. 거기에 대해선 굉장한 긍지를 느끼고 있죠. 벌써 나라에 짐이 된다거나 빚을 지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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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YO 세대’를 거론하며 ‘중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저명한 심리학 교수인 버니스 뉴가튼이 한 말인데 저는 그 말을 참 좋아합니다. 55세 정년을 기점으로 75세까지를 ‘영 올드(Young Old·YO)’라고 새롭게 정의한 거지요. YO 세대는 힘이 있어요. ‘행복한 독종’이라는 책에서도 증명한 바 있는데, 중년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모든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올라갑니다. 그게 ‘중년력’이지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제일 먼저 신체적인 힘을 떠올리는데 물론 그건 젊은이들을 당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설령 체력이 반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일을 할 때도 젊은이들은 순발력으로 하지만, 실은 순발력보다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더 많지요. 둘째, 정신적으로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줄어들고 머리가 나빠진다고 생각하지만, 지능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경력이나 내공이 쌓이면 절로 올라가는 결정성 지능도 있고, 전체를 보는 눈이나 리더십 등을 끌고 가는 통괄성 지능도 있지요. 이 통괄성 지능은 40대를 고비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어요. 또 신경세포는 한번 죽으면 살아나지 않지만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세포인 해마는 증식을 합니다. 그러니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거예요. 평생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와도 맞물리는 부분이죠. 그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고급 정보 등의 사회적인 힘은 젊은이들과 비교할 수 없고, 내면의 성숙을 뜻하는 영적인 힘 역시 중년들이 월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 내공이지요.”


이번 저서에도 ‘세로토닌적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복물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엔도르핀’이 아니라 ‘세로토닌’이에요. 우리 삶에 생기와 의욕을 주는 사랑, 행복과 같은 본능적인 활력의 원천이 되는 기능을 하는 게 바로 세로토닌이죠. 우리 사회가 너무 과격하고 공격적이고 자살도 많고 중독도 많은데, 뇌과학적으로 해석했을 때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세로토닌적 삶이란 게 다른 말로 하면 ‘선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선비라고 하면 일도 안 하고 정자에서 사색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돼 저항감이 있기도 하지만, 품격을 생명으로 하잖아요. ‘더, 더’라는 심리에 빠져 있는 이상 아무리 성장해도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요. 이제 그만하면 됐다, 자기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사는 내적인 성숙이 세로토닌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박사님을 롤 모델로 삼은 이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의 박사님을 가능케 한 인생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빚쟁이 마인드죠.(웃음) 저는 대구 팔공산 두메산골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해 이만큼 일구고 자랐으니 항상 사회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갖지 못했죠. 그 많은 책을 쓰는 것도 나의 지식과 느낌, 경험을 나누기 위함이에요. 저는 지금도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죽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사회를 위해, 크게는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까 늘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