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TATION POINT] 삶과 예술이 함께하는 와인 마니아들의 아지트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그건 동물 본연의 영역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와인바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곳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와인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의 공간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기 아까운 아지트 같은 와인바 네 곳을 소개한다.


화가와 법조인·삼성인의 사랑방
와이너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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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_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화가의 길을 걸어온 ‘와이너 리’ 주인장 이승호 사장. 젊은 시절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 두어 달 머물면서 맛봤던 와인 맛을 잊지 못해 30년간 ‘와인 앓이’를 하던 이 사장은 급기야 2004년 홍대 앞에 ‘술집 아닌 술집’을 연다. 원래는 젊은 예술가 여러 명이 작업실로 사용하는 공간이었지만, 취향이 비슷한 이들끼리 어울려 매일 와인을 마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실보다는 아지트처럼 활용되기 일쑤였다. 같이 작업하던 동료들도 하나 둘 떠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1층 100평짜리 공간에 와인바를 차리게 됐다. 처음에는 테이블도 없이 나무상자를 놓고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와이너 리’는 승승장구해 3호점까지 오픈했다. 이후 2개는 문을 닫고 지금은 서초동 지점만 ‘그림쟁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그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 직접 서빙도 하고 잔도 닦고 요리도 하며 손님들과 ‘와인이 있는’ 소소한 일상을 함께한다.

주요 고객_ 와이너 리엔 별다른 인테리어가 없다. 그저 빈 와인병과 와인 박스로 벽면 인테리어를 했을 뿐인데, 화가의 공간은 예술적 아우리가 뿜어져 나온다. 와이너 리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취지가 그러했듯, 초기 고객은 화가나 작가 등 예술가들이었다. 그 옛날 홍대 작업실 시절을 떠올리며 밤새 와인 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그림과 미술을 주제로 열띤 토론도 벌였다. 그러다 주변 법조인들이 지나는 길에 들르기 시작했고, 가까운 삼성그룹 와인 동호회 사람들도 찾게 됐다. 지금은 예술가들과 법조인, 기업인 등 다양한 고객이 한데 어울리는 자리가 됐다. 30년 동안 와인을 벗 삼아 온 이 사장은 해박한 지식으로 지역별 와인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데 이 매력에 빠진 손님들도 여럿이다. 한번은 이탈리아에서 온 노부부가 우연히 들렀는데, 사장이 화가라는 말을 듣고 밤새 음식과 와인을 안주 삼아 그림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 이후엔 이메일까지 주고받으며 친분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사장은 개인전에도 노부부를 초대할 예정이다.

와인 & 요리_ 와이너 리에는 와인 리스트가 따로 없다. 진열대의 300여 종 와인이 모두 리스트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와인숍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와인을 구경한 뒤 취향과 가격대를 고려해 골라 마시면 된다. 한 달에 40종류 정도 바뀌니, 1년이면 800~900가지 와인이 소개되는 셈이다. 칠레 베라몬테, 스페인 베로니아, 프랑스 샤토 레이뇽, 이탈리아 마테오 코리지에, 주세페 코르테제는 베스트 와인으로 꼽힌다. 경북 봉화에서 직접 공수해 온 국내산 자연산 송이와 이탈리아 포르치니버섯(표고·양송이·새송이)을 함께 담아낸 모둠버섯구이, 생양송이와 핫베이컨드레싱의 시금치샐러드, 국내산 오겹살 오븐구이와 백김치(참깨드레싱), 국내산 한우로 만든 안심스테이크, 양송이 베이컨 크림소스 떡볶이 등이 대표 메뉴다. 그림 그리는 솜씨만큼이나 손맛이 좋아 한번 그의 음식을 먹어본 손님들은 와이너 리의 팬이 된다. 이 사장은 요즘도 전 세계 와이너리를 돌며 각종 와인과 요리를 접한 뒤 손님에게 최상의 마리아주를 선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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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동 뚝방길 와인거리의 원조
크로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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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_ 김옥재 크로스비 사장이 와인바를 연 것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좀 더 많이 갖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일 중 좋아하는 술을 주제로 할 일을 생각했다. 원래 다양한 종류의 술을 좋아했다. 와인은 당연했고, 브라운 스피릿에서 화이트 스피릿까지 다양한 술을 좋아했다. 현재 크로스비는 500~600여 종의 와인을 취급한다. 와인 외에 다양한 술을 팔고 있기 때문에 와인바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매출은 와인과 싱글 몰트위스키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크로스비가 서울 양재동 와인거리의 원조로 불리면서, 크로스비 하면 와인을 떠올리기 때문에 와인바라고 해도 무방하다. 크로스비가 있는 2층과 별도로 1층에는 와인과 리큐르 등을 판매하는 숍도 운영하고 있다. 크로스비가 이름을 얻으면서 바와 관련한 물건을 파는 이홈바(www.ehomebar.kr)라는 바 용품 전문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주요 고객_ 현실적으로 많은 매출을 올려주는 고객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김 사장은 균형 잡힌,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이 크로스비를 찾기를 원한다. 이는 크로스비의 초기 콘셉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크로스비를 오픈하면서 김 사장은 ‘혼자 와도, 누구와 와도 실례가 되지 않는 적당한 균형’을 콘셉트로 잡았다. 바는 격식을 중시하는 레스토랑과 다르다. 바는 특별한 장점보다는 무엇 하나 특별히 부족하지 않은 균형감이 필요하다. 크로스비의 성공은 그 같은 콘셉트를 한결같이 유지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균형 잡힌 고객층을 원하는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김 사장은 성별과 나이, 계층과 직업군 등 다양한 고객이 크로스비에서 소셜 리믹스 되기를 바란다. 매출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하지만 술에 호기심을 가진 젊은 고객들은 크로스비의 미래다.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 못하지만 매력적인 젊은 층들은 바에 생기를 불어넣는 소중한 존재다.

와인 & 요리_ 크로스비는 매달 ‘이달의 와인’ 11가지를 선정한다. 매달 계절에 맞는 와인을 선별하는데, 스파클링 와인 세 가지, 화이트 와인 세 가지, 레드 와인 세 가지, 스위트 와인 두 가지 등이다. 크로스비의 가장 큰 장점은 이처럼 매달 새로운 와인을 글라스로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병으로 서비스되든, 글라스로 판매되든 매달 잘나가는 와인은 이달의 와인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크로스비는 신세계 와인보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와인의 비중이 높다. 이는 다른 와인바에 비해 크로스비가 보다 잘 아는 분야이기도 하다. 음식은 20여 가지가 준비돼 있다. 하지만 음식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가 인기가 높다. 크로스비에서는 20가지 이상의 좋은 치즈를 갖고 있는데, 와인에 적합한 치즈를 선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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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신사동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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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_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2길에 있는 신사동발견의 외양은 오래된 창고 같다. 완고해 보이는 문을 열고 바가 있는 입구를 지나면 안쪽으로 크지 않은 홀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광고쟁이와 출판인, 영화인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아지트, 신사동발견이다. 김원희 사장이 동생인 김은희 씨와 이곳에 둥지를 튼 건 2011년 9월이다. 20대 중반 동생과 함께 에스프레소바를 경영한 김 사장은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서울와인스쿨과 중앙대에서 와인을 공부했고, 와인숍과 와인 수입업체에서도 일했다.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하며 이탈리아와 미국의 좋은 와인은 거의 다 마셔봤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2011년 동생과 뜻을 모아 지금의 신사동발견을 오픈했다. 원래는 양재동 부근에 가게를 얻으려 했지만 신사동발견이 있는 터를 보고는 ‘이거다’ 싶어 덜컥 주저앉았다.

주요 고객_ 신사동발견은 세로수길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광고대행사, 광고와 영화 관련 스튜디오, 강남출판문화센터 등이 넓게 포진해 있다. 그들이 주요 고객이다. 특히 광고나 영화 쪽 사람이 신사동발견을 자주 찾는다. 가끔은 낯익은 영화감독과 배우도 불쑥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금의 신사동발견은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CD를 구워주면서 음악 선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끔은 시리즈로 CD를 구워주기도 했다. 음악도 다양해서 부에나비스타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한국 가요, 심지어 스튜디오에서 녹음은 했지만 발매가 안 된 음반을 갖다 주기도 했다. 신사동발견에서 와인을 마시다 받은 ‘필(feel)’을 그렸다며 유화를 선물하는 이도 있었다. 김 사장은 내부 인테리어 말고 신사동발견의 전체 분위기는 그런 손님들이 만들었다고 했다. 물(손님) 관리도 그들 몫이었다. 끼리끼리 몰려와 원하는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셨고, 다음에는 지인들을 데려왔다. 가끔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을 신사동발견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들에 의해 신사동발견은 지금까지 자가발전을 한 셈이다.

와인 & 요리_ 신사동발견은 오픈 후 3개월까지 와인 리스트가 없었다. 착한 손님들은 주인장이 추천하면 “다 좋다”며 그대로 마셨다. 8만 원이 넘는 와인은 가격을 말하며 “괜찮냐”고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지내고 메뉴판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새로 들어온 와인과 들어오지 않는 것 등을 일일이 메뉴판에 기록한다. 추천 와인의 기준은 맛과 레이블 등이다. 신사동발견에서는 파커포인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덕에 10만 원이 넘는 와인은 거의 없다. 요리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날그날 주인장이 장을 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물 좋은 해산물을 만나면 그게 그날 테이블에 오른다. 최근에는 방어와 참치 요리를 했는데 호주 레드 와인과 잘 맞았다고 한다. 김 사장은 장을 본 후 단골들에게 “오늘은 어떤 재료가 왔다”고 문자를 보낸다. 가끔 손님들이 좋은 와인을 갖고 오면 거기에 맞춰 요리를 내기도 한다. 초기엔 코르키지(corkage)를 안 받았지만 단체 모임 등은 감당이 안 돼서, 지금은 세 병부터 코르키지를 받는다. 손님 중에는 어떤 와인을 가져온다고 문자를 보내기도 하는데, 그걸 참고해 장을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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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라이프 즐기는 트렌디한 2030의 공간
와인주막 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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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_ 서울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 중 한 곳인 홍대. 지하철 홍대역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한 와인주막 차차는 홍대 문화를 온몸으로 만끽하려는 젊은 층에게 인기 좋은 와인 비스트로다. 주막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편안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와 결코 비싸지 않은 가격대가 이곳의 장점이다. 여기에 젊고 패기 넘치는 주모(?)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와인 이야기는 술맛을 더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나기정 와인주막 차차 사장은 일찍이 와인의 세계에 눈떴다. 영국에서 와인MBA를 졸업한 뒤 귀국해 와인수입사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며 줄곧 와인 문화, 와인의 대중화에 관심을 가졌다. 고급술이라는 와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무엇보다 손님들에게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마시는 와인 문화를 선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떠올린 것이 바로 차돌박이. 숯불에 구운 차돌박이와 함께 마시는 와인을 콘셉트로 와인주막 차차를 열게 됐다. 한식과 와인의 ‘융합’은 앞으로도 나 사장의 영원한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고객_ 와인주막 차차를 찾는 주요 고객층은 20~30대 젊은 층, 그중에서도 전문직 여성들이 주로 방문한다. 홍대라는 지리적인 이점도 있었지만 와인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욕구도 큰 젊은층을 주요 고객층으로 잡은 것이 주효했다. 20~30대 여성은 최근 맛 문화, 멋 문화를 주도하는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어 그들을 만족시키면 다른 고객층의 흡수도 가속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접대성이 아닌 본인의 비용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방문 횟수를 늘렸다. 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입소문을 내면서 고객층은 더 두터워졌다. 그들은 퇴근 후 좋은 사람과 간단하게 한 잔 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에 환호했으며, 합리적인 가격대로 와인과 정갈한 한식을 곁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와인에 문외한이었는데 친구 따라 한 번 온 이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3개월째 방문하고 있는 손님도 있다. 나 사장은 “와인바 문턱을 조금 낮췄을 뿐인데 사람들은 와인을 훨씬 사랑해준다”며 흐뭇해했다.

와인 & 요리_ 와인주막 차차는 한식과 와인의 마리아주를 철저하게 고집한다. 특히 깔끔하게 숯불에 구워 제공하는 차돌박이 메뉴는 이곳의 얼굴. 무화과 차돌박이 샐러드는 깔끔하면서도 상큼해 여성들이 특히 선호하는 메뉴다. ‘라 시부아즈’가 잘 어우러진다. 상큼한 레몬 즙을 짜 먹는 통영 생굴도 인기다. 몸에도 좋고 피부에도 좋은 굴은 ‘타리케 클래식’과 함께 곁들이자. 달짝지근하면서도 얼큰한 육수 맛이 일품인 차차 맑은 떡볶이는 ‘로소 디 베라차노’, 차돌박이 구이와 육회, 부추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 차돌박이 육회 쌈은 ‘아발론 캘리포니아’와 함께 맛볼 것을 추천한다. ‘미션 서드’와 된장숙성 등심 깍두기의 궁합도 일품이다. 와인과 음식 모두 1만9000원부터 3만5000원 사이의 ‘착한 가격’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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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규섭·이윤경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