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네 번째 최인훈의 ‘광장’

길과 길이 만나 분기하는 지점이자 사람과 사람이 만나 머무르다 흩어지는 원점인 광장은 분명 삶을 태동케 하는 힘이다. 험난한 길이라도 언젠가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리는 광장과 마주하게 될 것이란 기대는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광장’은 낯설기만 하다. 1960년대 남북한의 현실을 ‘광장 없는 밀실’, ‘밀실 없는 광장’으로 빗댄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고전인 최인훈의 ‘광장’이 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광장이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낸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하더라도 그렇다.
[GREAT TEACHING] 광장, 삶과 문명의 문화지리지
이번 겨울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고전과 명작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그런데 약간은 생뚱맞은 상상을 하게 됐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이탈리아를 만든 고전’이라는 상상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어디를 가나 ‘고전’이고, 무엇을 만나도 ‘명작’이기 때문에 몇몇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 정신을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고전’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현재 속에 스며 있기 때문에 ‘고전’이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감촉된다.

이탈리아에서는 ‘고전’과 ‘고전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 구별할 수 없음, 혹은 이 분리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고전’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피렌체는 이미 알려졌다시피 근대 유럽을 이끌어낸 르네상스(Renaissance)의 발상지인데, 그냥 걷기만 해도 몇백 년을 이어온 돌길을 통해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고전이란 ‘무엇’으로 지목될 수 있는 특정한 무엇이 아니라 한 사회의 인문 정신이 만들어낸 결실이라는 것, 즉 미켈란젤로와 단테가 피렌체가 배출해낸 예술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최후의 심판’과 ‘신곡’이 피렌체의 도서관과 아카데미 속에서 씨앗을 틔운 채 700여 년을 이어져 왔다는 상상은 괜한 게 아니었다. 피렌체, 아니 이탈리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고전 텍스트다.


길과 길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연일 탄성을 쏟아내며 이탈리아를 순례자처럼 걸어가노라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새삼 온몸으로 와닿았다. 길마다 여행객들로 가득한 그 길을 지금도 무수한 관광객이 걷고 있다는 것, 실은 그래서 이탈리아에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그 길마다 매듭처럼 멈춰 서게 하는 곳에 광장이 있다는 사실이다. 산마르코 광장, 미켈란젤로 광장, 베네치아 광장, 시뇨리아 광장, 나보나 광장 등 길과 길을 만나게 하고, 길이 도달하는 지점에 광장이 있다. 또 광장 주변에는 어김없이 예배당이 있으며 예배당 옆으로 미술관이나 도서관, 극장이나 박물관, 그리고 행정관청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를테면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광장은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로 칭했던 곳인데, 널찍한 모양새를 논하지 않더라도 후비진 골목길을 한참 헤매다 한눈에 시야가 확 트이는 그 황홀함은 그런 칭송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이탈리아의 광장(piazza)은 길과 길이 만나 분기하는 지점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머무르다 흩어지는 원점이다. 그래서 골목길에서 잠시 길을 잃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느새 광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몇백 년 전 책을 뒤적이며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족히 수백 년 동안 그래왔을 것이다. 이 광장이 바로 삶을 태동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광장은 아주 오랫동안 공공적 삶의 문화지리지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서 ‘광장’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공터와 장터의 문화가 있다지만 이곳들은 도시 개발의 과정에서 공원이나 마트 정도로 바뀌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전의 길은 막다른 길이 되거나 골목길로만 남아 있다.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에 차도나 건물이 들어서면서 낯선 골목길은 조금은 두렵거나 불편하다. 길과 길이 만나는 흐름과 리듬이 사라졌으며 길의 역사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문화사 안에서 ‘광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남북한의 현실을 ‘광장 없는 밀실’, ‘밀실 없는 광장’으로 빗댄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광장’을 말하고 있으나 실은 광장이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낸 작품이다.
[GREAT TEACHING] 광장, 삶과 문명의 문화지리지
1960년대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이데올로기에 갇힌 밀실과 광장으로 풀어낸 이 소설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 이명준이 드러내고 있는 ‘광장’에 대한 갈급함이다. ‘광장’에서 등장하는 밀실과 광장은 실은 이탈리아의 골목길과 광장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반복적으로 밀실이 닿아야 할 광장을 강조한다. 이명준은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이상적인 삶을 꿈꾸나 그가 현실에서 대면하는 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으며’ 바늘 끝만한 양심을 지키며 탐욕을 조절하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시민들은 광장으로 나가는 문을 잠가 버렸다고 말한다. 탐욕과 배신이 광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사정은 명준이 접한 전후(戰後)의 북한도 다르지 않다. 주인공 이명준이 보기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쓰고’ 있어서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이 없는’ 그럴싸한 ‘인민’의 꼭두각시만이 행세를 하는 거짓 광장이기는 매한가지다. 전후의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참상의 양면이다.


‘광장’을 말하지만 ‘광장’이 없음을 웅변한 작품
이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남한에서 이명준은 대학신문에 글을 싣지만 누가 볼까 봐 애써 덮어두려 한다. 신문에 실어놓고도 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을 나누지 않은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다. 실은 신문에 실린 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없었던 것. 오히려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급속하게 유입된 너절한 미국 문화뿐이다. 그래서 철학도였던 이명준은 지극히 관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비판적으로 관찰하기만 한다. 북한에서의 방식은 오히려 정반대다. 이명준은 북한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여러 기사를 쓰는데 공개적으로 읽히지만 획일화된 내용만을 강요받을 뿐이다. 이명준의 목소리를 지운 채 당의 지침만을 강조하는 논리. 그의 목소리가 광장으로 발화되지 못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전후의 남북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며 우리네 삶이 왜곡됐음을 통찰해내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명준은 수백 권의 세계 고전을 탐독하며 고전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나 그의 글쓰기가 그러하듯 밀실 속의 앤티크한 취미로 전락하며 그것마저도 포기한다. 또 진실한 관계를 꿈꾸며 사랑에 빠져들기도 하나 배신당하거나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참담한 현실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가 전후의 파편화된 현실을 그대로 추인하는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밀실 없는 광장, 광장 없는 밀실의 ‘상황논리’를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결국 절망적으로 ‘중립국’을 선택하지만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윤혜와 딸을 떠올리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만다. 이 결과는 분명 불행한 것이다. 그 어디에도 거처할 수 없음의 실존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에겐 중립국이라는 선택이 막다른 골목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광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발을 디뎌야 한 선택 아닌 선택.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우리 삶 안에서 ‘광장’이 실존적 선택을 좌우하는 지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비할 수 없다.

삶은 매번 낯선 길에 들어서는 일이다. 험난한 길일지라도 언젠가 사람들의 얘기소리가 들리는 광장과 마주하게 될 거라는 기대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막다른 골목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 시간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네 삶 속에서 길과 길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리고 길 끝에 왜 ‘광장’이 있어야 하는지 돌아보는 이유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