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욕망의 이름, 사과(Apple)

사람들은 예로부터 사과라는 작은 과일에 빗대어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을 흔히 표현했다.
신화, 종교, 과학, 예술 등에서 사과는 불멸, 아름다움, 죄, 구원, 힘, 지식, 학문 등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띠며 널리 회자됐다.

사과의 상징에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상반된 인식이 함께 녹아 있고, 한편으로는 그 한계와 결핍을 넘어서려는 궁극적인 욕망이 담겨 있다.
레이턴 경,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1892
레이턴 경,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1892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라 불리는 황금사과는 신의 영역에 속한 금단의 과일이었다. 황금사과는 원래 제우스와 헤라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선물한 것이었다. 헤라는 그 사과를 세계의 서쪽 끝에 있는 정원에 심고 아틀라스의 세 딸인 님프 헤스페리데스와 잠들지 않는 용 라돈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거기서 자란 나무는 황금가지와 황금잎을 가졌고 황금열매를 맺었다. 그 눈부신 광채로 서쪽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 등장하는 사과
19세기 말, 레이턴 경(Sir Frederick Leighton)은 이 신화와 밀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그렸다. 목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 세 님프 중 하나는 노래와 연주에 취해 있고 두 님프는 잠에 빠져 있다. 인물들이 나른하고 방심한 상태인 데 비해 거대한 뱀으로 표현된 용은 깨어서 사과나무와 가운데 여성을 휘감고 있다. 레이턴은 상상의 낙원 속에 님프의 특징과 뱀의 속성을 결합해 관능적 유혹을 암시하는 장면을 구사했다.

한편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11번째 노역으로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를 가져오라는 임무를 맡는다.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를 찾아가 그가 받치고 있는 천구를 대신 받쳐주는 등 기지를 발휘해 사과를 얻는 데 성공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황금사과는 아테나가 다시 신들의 정원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황금사과는 신의 소유물로서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즉 불멸의 상징이다. 사과를 획득한 헤라클레스는 모든 노역을 완수한 다음 마침내 신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다.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는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미술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로마 황제 콤모두스의 흉상조각을 보면, 그는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오른손에는 곤봉을, 왼손에는 사과들을 들고 있다. 사자 가죽, 곤봉, 사과는 모두 헤라클레스의 상징으로 그의 힘과 지략을 나타낸다. 콤모두스는 로마의 헤라클레스로 자부하며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고 희생을 강요한 폭군이었다. 그의 조각상이 들고 있는 사과는 황제의 권력을 넘어 영생불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또한 신화의 다른 이야기에서 황금사과는 아름다운 여인의 표징이 되기도 했다. 퓌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불화의 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다. 화가 난 에리스는 결혼식장에 나타나 모여 있는 하객들 사이로 황금사과를 던져 넣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에 제각기 아름다움을 자부하는 여신들의 다툼을 불러일으켰다. 그중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정식으로 미를 겨루게 됐고 그 심판을 목동으로 떠돌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맡게 된다. 파리스가 선택한 미의 여신은 아프로디테였다. 그는 황금사과를 선뜻 그녀에게 쥐어준다.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뽑아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이긴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파리스가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와 결혼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왕비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트로이전쟁이 일어나는 불씨가 된다.
브론치노, ‘비너스, 큐피드, 시간: 욕망의 알레고리’, 1540~1545
브론치노, ‘비너스, 큐피드, 시간: 욕망의 알레고리’, 1540~1545
수많은 미술작품의 주제가 된 ‘파리스의 심판’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는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매혹적인 주제는 수많은 미술작품에서 되풀이돼 재현됐다. ‘파리스의 심판’에 의해 사과는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특별한 지물이 됐고, 흔히 ‘비너스의 사과’라 불리면서 세속적, 관능적 사랑과 아름다움을 의미하게 됐다. 16세기 매너리즘 시기의 화가 브론치노(Agnolo Bronzino)가 그린 ‘비너스, 큐피드, 시간’이라는 그림은 비너스를 둘러싼 욕망에 대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작품 2).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주문했다고 여겨지는데, 산만해 보이는 특이한 구성과 차가운 듯 고급스런 색채가 자아내는 호사스런 분위기가 귀족적 취향을 반영한다. 이 그림에서 전경에 앉아 있는 주인공은 황금사과를 쥐고 있어 자신이 비너스임을 나타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육체를 전면에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 큐피드의 화살을 들고 사랑의 포로가 되고 있다. 큐피드는 비너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입맞춤을 하면서 에로틱한 느낌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에 비해 뒤편의 인물들은 덧없는 시간, 망각, 질투, 위선 등을 상징하며 감각적인 사랑에 따르는 위험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6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6
17세기 화가 루벤스는 사과를 든 파리스와 헤르메스 앞에 세 여신이 나체로 서서 심판을 기다리는 장면을 여러 점 제작했다(작품 3). 세 여신은 각기 다른 포즈로 희고 풍만한 육체를 뽐내면서 파리스의 손에 있는 사과를 얻고자 한다. 여기서 파리스가 선택한 미의 기준이 다분히 육체적이고 성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과는 그러한 에로틱한 매력의 보증인 셈이다.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191~192 AD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191~192 AD
이처럼 사과는 신화 속에서 불멸, 아름다움, 사랑 등 인간이 욕망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을 상징한다. 동시에 그 속에는 탐욕에 대한 엄중한 경계와 위반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다. 사과는 단순히 특정 과일이 아니라 어떤 위험도 무릅쓸 만큼 가치 있는 것, 다시 말해 영원한 욕망의 이름이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