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무명의 희곡 작가 헬렌한프는 까다로운 한 가지 취향이 있다. 다름 아닌 아름다운 책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이다. 그 무엇보다 책을 좋아하지만, 잉크 냄새 풍기는 새 책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기에 책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프는 한 문학평론지에서 우연히 ‘절판 서적 전문’이라는 광고를 접하고 영국 런던의 차링 크로스84에 있는 한 고서점으로 편지를 쓴다. “동봉한 도서 목록 중 ‘보관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고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빈티지 북이라면’ 발송해 달라”는 편지를 시작으로 무려 20년에 걸쳐 대서양을 넘나드는 우정이 시작된다.한프와 고서점 주인의 인연이 세상에 알려진 건 한프가 이 편지를 책으로 출간하면서다. 책이 나오자 이 낭만적 이야기는 독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앤터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84번가의 연인(84 Charing Cross Road)’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북 컬렉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영화속에 서점이 있었던 런던의 레스타 스퀘어와 코벤트 가든으로 이어지는 길목, 차링 크로스 로드의 고서점들은 북 마니아들에게 매력적인 거리임에 틀림없다. 비단 차링 크로스뿐이랴. 헌책으로 유명한 웨일스 산속 마을, 헤이온 와이에 오늘도 사람들이 붐비는 것은 고서적에서 뿜어내는 지적 즐거움이 거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책은 지식의 총화(總和)다.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와 경제 수준은 당연히 책과 연관된다. 선진국이라 일컫는 G7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고급스러운 문화의 저변에는 아름다운 책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은 읽고 버리는 학습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산이라는 뜻이다.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는 책의 미학을 중요시했다. 그는 평생을 아름다운 책 만들기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런 전통은 이미 중세 수도사들에 의해 샤를마뉴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면면히 유지돼 왔다. 그러한 책들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만들어졌으며 큰 문화적 자산으로 오늘 앤티크 컬렉터들을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요즘 우리는 모던 아트의 열풍에 휩싸여 있지만 앤티크 북 거래 시장 역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1998년 한 권의 책이 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거래된 바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책의 낙찰가는 756만5396달러였다. 한 권의 책값이 물경 70여억 원을 호가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 책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였다. 1477년 윌리엄 콕스턴에 의해 출판된 초판 가운데 현존하는 9권 중 하나로서 당시 예상가를 무려 열 배나 넘겼다.책의 가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성이 가장 우선되며 초판은 중판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는다. 보존 상태도 매우 중요한 가치 결정의 요인이 된다. 바인딩의 미적 기준 역시 변수가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삽화일 것이다. 삽화의 유무와 그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의 사인이 있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특히 그가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라면 몇 백배까지도 차이를 보인다. 또한 저자의 명성(수상 경력 등)과 가격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단테는 삽화를 ‘책의 미소’라고 했다. 삽화, 즉 일러스트레이션은 ‘비추다’라는 뜻이다. 삽화는 본문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이리라. 실상 삽화의 역사는 책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가운데 ‘사자(死者)의 서’에는 사후 세계의 정경이 기록되고 그 내용도 상세히 묘사돼 있다. 중세 이후 크리스트교의 발전과 더불어 성서, 복음서 등에 삽화를 넣는 것이 일반화되자 전문 삽화가도 출현한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금·은·광물 안료를 써서 가는 붓으로 정성들여 그린 이 미니아튀르(miniature)라 불리는 삽화들은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J 푸케 등은 삽화가로서 특히 유명하다. 또 이슬람 세계에서는 역사·문학 및 의학·수학·천문학 등 과학서적에 우수한 삽화를 그려 넣었다.초기의 인쇄는 단색이었으므로 인쇄 뒤에 손으로 채색하는 과정이 뒤따랐으며 기도서는 물론 역사서·문학서에까지 삽화를 넣는 것이 일반화돼 단순한 정경 설명에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이런 종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서 미완성이기는 하나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의 ‘신곡(神曲)’이 있다. 이 경향은 근세에 이르러 더욱더 강해져 도레의 ‘실락원’, 블레이크의 ‘신곡’, 비아즐리의 ‘살로메’ ‘아서왕의 죽음’ 등의 명작이 탄생한다.판화로서의 프린트 기법은 목판으로부터 시작해 석판에 의해 완결됐다. 저넷 엘더(1771~1834)가 처음 시작한 석판화는 프린트 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화려한 신문을 만들거나 책에 좀 더 양질의 삽화를 넣을 수 있었으며 조각 기술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작업이 화가 자신에 의해 직접 행해지게 됐다. 궁극적으로 현대 인쇄 기술의 초석을 놓는 계기를 마련했다. 판화 기법으로는 릴리프(relief) 기법과 인탈리오(intaglio) 기법, 서피스(surface) 기법, 스텐실(stencil) 기법 등이 있다.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서관 입구에 ‘영혼의 요양소’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영혼을 쉬게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네스코는 이 거룩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다시 재건하고 있기도 하다.우리나라에서도 독서를 매우 귀하게 여겼기에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멋진 제도가 있었다. 1420년 3월, 세종이 집현전 학사 중에서 선발해 유급 휴가로 독서에 전념하게 한 것이다. 최초 선발은 1426년에 있었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했으나 집에서는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 하여 1442년부터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도 불렀다. 1517년(중종 12)에는 두모포(豆毛捕)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 한강 동호대교 자리)을 설치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16세기까지는 사가독서제가 활발히 운영됐다. 1528년에는 독서당 규칙을 만들어 계절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고, 월별·주별로 제술 시험을 보아 불합격하면 퇴거시켰으며 왕들은 술과 악(樂), 물품을 내려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 이후에는 침체해 명맥만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폐지됐다.1 13세기 디자인으로, 성경 열왕기 3권 이니셜을 아름답게 그렸는데 이 채색 사본을 그린 채식사는 글자 아랫부분에 동물의 어깨뼈로 만든 팔레트를 들고 작업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2 벨벳 위에 에나멜 소재로 아플리케 장식을 했다. 브론즈 도금으로 장식한 러시아 쌍두 독수리 문장으로 소유자 가문을 드러내면서 코너에 실버 주얼 장식으로 책의 품위를 높였다.3 에드워드 번존스의 삽화와 함께 모리스가 디자인한 채색사본, 책 ‘Book of Verse’.4 하드 커버에 금박으로 돋을새김한 장정으로 1845년도 판이다.5 폴랑드르 벨벳으로 만든 표지로, 금실과 은실로 자수 장식을 크리스털 주얼 테두리로 해 가치를 최고로 높였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이다.6 찰스 페어팩스가 돕고 윌리엄 모리스가 펴낸 책. 1872년 디자인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소장, 채색사본으로 오마카이암의 루바이아트(The Rubaiyat of Ormar Khayyam).7 그롤리아 스타일로 장식한 책. 프랑스의 애서가인 그룰리에드 세르비에는 많은 서적을 수집해 자신만의 장정으로 꾸몄다. 그의 이름을 딴 그룰리에 스타일은 모로코산 가죽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장정을 가리킨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장정 표지.8 1808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책 표지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물의 요정 나이아드가 앉아 있는 모습. 송아지 가죽에 붉은 칠을 한 후 그 위에 도금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9 12권으로 제작된 윌리엄 모리스 디자인의 라틴어 아에네이드(The Aeneid). 비너스와 아이네이아스가 리비아 해변가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린 채색사본 1873년도 제판으로 현재 약 35만 달러를 호가한다.10 은도금에 도름질 세공(비쳐 보이게 하는 세공) 양각 장식한 기도서. 독일 1714년.김재규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