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이 70을 넘긴 사람은 어떻게 웃는지 아십니까. ‘빈 虛(허)’ 자를 써 ‘허허허’라고 웃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예전부터 관심을 가져 온 예술 경영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에 하루하루를 ‘허허허’ 웃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박웅서 고양문화재단 대표는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20여 년 전 한국경제신문에서 읽었다는 유머 한 토막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박 대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표적인 최고경영자(CEO)이자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다. 호주 멜버른대 교수, 삼성전자 부사장, 삼성석유화학 사장,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고합 대표이사 회장 등 그가 거친 이력은 국내 여느 경제학자나 CEO와 견줘도 화려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작년 말 고양문화재단 대표로 선임됐을 때 그를 아는 이들은 “고양시가 적임자를 찾아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 음악인에 버금가는 음악적 조예를 갖추고 있는 데다 삼성 그룹에서 CEO의 역량을 쌓은 박 대표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와 음악과의 만남은 1948년 고려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장하린 선생을 사사하면서 시작됐다. 음악에 마음을 사로잡힌 그는 대학시절 4년 연속 단과대 음악회를 주관했고 1958년에는 한국남성합창단을 설립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유학 시절과 직장생활 동안에도 꾸준한 음악 활동을 펼쳤고 1993년에는 예성음향사에서 ‘박웅서 애창곡 모음’이라는 음반을 내기도 했다.박 대표가 취임 후 가장 공을 들인 일은 지난 5월에 있었던 고양아람누리의 개관 이벤트였다. 그가 “극장 설비나 음향 수준에서 세계 5대 극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자부하는 이 공연 시설의 성공적인 개관을 위해 그는 양질의 작품을 유치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대표로 취임하고 나서 보니 개관 행사 기획이 전혀 안 돼 있었습니다. 뒤늦게 제대로 된 기획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극단들은 이미 2~3년 치 스케줄이 모두 잡혀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죠.”급한 대로 박 대표는 초청 공문을 전 세계 주요 극단에 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단에서 받은 회신에는 ‘2008년에나 생각해보자’는 내용뿐이었다. “그렇다고 개관 이벤트를 옹색하게 치를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여름휴가를 늦춰서라도 우리 공연장에 와줄 수 없느냐고 다시 요청했더니 3군데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그중 한 곳이 바로 스타니슬라프스키였습니다. 이 극단은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오페라 극단인데, 이번에 선보인 카르멘 역시 현대적으로 각색된 작품입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극단의 분위기와 우리 극장이 추구하는 것이 잘 맞았기에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봅니다.”러시아 3대 오페라극단으로 꼽히는 모스크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오페라 ‘카르멘’ 은 객석 점유율이 85%나 될 정도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 밖에도 고양아람누리는 5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개관 기념 예술제 기간에 창작 발레 ‘춘향’과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등 발레·오페라·창극·클래식·국악·디지털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총 17편씩이나 무대에 올렸다. 이 중에서도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불멸의 베토벤’ 1회 공연은 1420명이나 관람해 98%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고양아람누리는 오페라, 뮤지컬, 발레를 위한 아람극장, 오케스트라 연주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콘서트 전용 극장인 아람음악당, 실험적인 공연이 가능한 새라새극장으로 구성돼 있다. 최신식 무대 장치 설비를 갖춘 1887석 4층 규모의 아람극장은 무대에서 객석까지의 거리가 36m에 불과해 배우들의 몸짓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게 설계됐다. 새라새극장은 객석이 16 등분으로 구분돼 일반적인 무대 외에도 회전무대, 마당극 무대 등으로 변신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패션쇼에서부터 마당극까지 모든 장르의 공연을 진행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앞으로 이 새라새극장에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선보일 계획이다. “후발 주자가 성공하기 위해선 더 뛰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직원들에게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번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손잡고 선보이는 신타지아는 정보기술(IT)과 공연 문화가 만났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습니다. 또 구체적인 기획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현재 영화 ‘쥬라기 공원’의 그래픽 담당자가 기획한 공연 아이템을 놓고 한창 논의 중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형식의 공연인데, ‘연극무대가 영화가 된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초연되면 세계적으로 큰 뉴스거리가 될 겁니다. 기획자가 아람누리 내 실험극장인 새라새극장을 와 보고 나서 자기가 찾던 극장이라며 제안서를 보내왔습니다. 이 밖에도 KAIST의 도움을 받아 로봇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공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게임, 영화 등에 한정돼 있는 IT 기술을 공연 문화에도 접목했다는 점에서 고양아람누리의 시도는 공연계에 신선한 충격이다. 개관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른 그는 요즘 고양문화재단의 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는 데 여념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고양아람누리는 한국을 넘어 세계 5대 공연장이다.“세계적인 공연장으로 성장하기 위해 아람누리는 모든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 수요를 끌어들이기 위해 지하철역(3호선 정발산역)과 바로 연결되도록 설계했고, 내부 음향장치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공사비 1500억 원을 비롯해 총 자산 가치가 1조 원에 이르는 공연장을 만들 때는 세계적인 공연 문화 공간으로 키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세계적인 공연 문화 공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고양아람누리의 당면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자체 제작 공연’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우리 극장이 세계적인 공연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체 제작 비율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라 스칼라 등 세계적인 공연장에 가보면 자체 제작된 공연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또 전속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운영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선 부대시설을 잘 활용하는 한편 예산을 더 많이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그는 대기업 CEO 출신답게 국내 공연계의 낙후된 경영 방식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우리나라 공연 예술계의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경영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공연은 고도의 마케팅 기법을 요구하는 산업인데 경영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표로 취임하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한 것이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초기엔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이와 함께 박 대표는 많은 기업들의 후원도 빼놓지 않고 당부했다.“우리 재단은 수익을 내는 사기업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물론 많은 기업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최근 주요 기업들마다 문화 예술과 접목된 행사를 많이 기획하고 있는데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표이사에 취임하기 전만 해도 대관 스케줄이 텅텅 비어 많이 걱정했는데 개관 기념작들이 생각보다 많은 센세이션을 일으켜 지금은 연말까지 스케줄이 모두 차 있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안착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공사비 1500억 원을 비롯해 총 자산 가치가 1조 원에 이르는 공연장을 만들 때는 세계적인 공연 문화 공간으로 키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박웅서 (고양문화재단 대표)서울대 상과대 졸업미국 피츠버그대 경제학 박사호주 멜버른대 교수세종대 경영대학원 교수삼성그룹 회장 고문삼성석유화학 사장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