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스에는 비아제(Viager)라는 제도가 있다. 비아제는 프랑스어로 종신 또는 종신연금을 뜻하지만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사적 연금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업연금이나 개인연금과는 전혀 다르다. 이 비아제 광고가 부동산 매매나 임대차를 전문으로 하는 프랑스의 주간지에 자주 실리고 있다. 이런 식이다. ‘V-56124 : 니스시 중심의 단독주택. 대지 250㎡, 건물 92㎡. 남향…(중략)…거주자는 2명으로 남 81세, 여 77세. 일시금(Bouguet)+종신정기급부금(Rente). ○○부동산중개업소’ 설명하자면 이 광고의 뜻은 이렇다. ‘81세의 남자와 77세의 여자가 둘 다 사망할 때까지 약간의 일시금(보통은 부동산 가격의 20~30%)을 포함해 매월 일정액을 지급하는 사람에게 이 집을 줄 테니 그때까지 우리에게 월 얼마씩 주겠니?’이 광고에서 보듯이 비아제에는 분명 사행성이 있다. 매수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도자가 빨리 사망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비인간성을 지적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관습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비아제 거래 건수는 연간 4000~7000건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비아제가 ‘차가운 이성이 낳은 합리적인 제도’인 것이다. 그만큼 프랑스의 고령화 문제는 심각하다. 은퇴 연금만으로 넉넉지 못한 노인이 재산이라곤 달랑 집 한 채일 때 사망할 때까지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아제는 훌륭한 사적 연금의 기능을 한다.비아제가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고령화 문제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에 5.1%, 2000년에 7.2%에 불과하던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올 들어 9.9%로 올라섰다. 2018년이면 이 비율은 14.3%, 2026년에는 20.8%까지 상승할 것이다. 지난 12일부터 시작된 주택연금(역모기지론)은 이런 배경에서 도입됐다.그러나 한 시중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이 제도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용은 주저하는 사람(이용 의향이 없다 54.5%)이 오히려 더 많다. 오히려 자녀들은 부모님의 주택연금 이용에 훨씬 호의적(찬성 64.3%)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이상으로 부모들이 오히려 자녀들을 의식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자녀들로 인해 자신을 속박하기로는 이미 은퇴한 사람만이 아니다.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 또한 자식들의 양육에 올인(all-in)하고 있다. 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97%는 은퇴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40%에 불과하고 은퇴 준비를 못하고 있는 나머지 60% 가운데 60% 이상이 교육비(자녀 양육비)를 그 이유로 꼽았다.더욱이 재미있는 현상은 다시 은퇴 준비를 한다면 줄일 항목이 무어냐는 질문에 은퇴자의 39.6%, 은퇴 준비자의 21.6%가 전체 지불액 중에서 고작 2.7%밖에 안 되는 문화 생활비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차마 자녀 교육비를 줄일 수는 없으니 만만한 문화 생활비를 줄이자는 생각일 테지만 그들이 지출한, 혹은 하고 있는 그 문화 생활비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세대 간에 소득과 부의 합리적 이전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진정 자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보다 사려 깊은 성찰과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김상윤하나은행 웰스 매니지먼트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