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 빌딩 전체가 달아오른다. 이 더위, 산사에서 시원히 날려버릴까. 매미와 계곡 물소리에 바쁜 일상사 잠시 마음 놓는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어느 해 늦가을 쓸쓸히 찾았던 완주 화암사(花巖寺)가 생각난다. 호남고속도로를 벗어나 완주 동봉을 거쳐 경천을 지나 화암사라 쓰인 작은 팻말을 따라 개천을 건너니 풍경이 완연한 시골이다. 감나무가 퍽 많다싶었는데 농가 여기저기에 곶감 말리기에 여념이 없다. 주황빛 감들이 시렁에 주렁주렁 매달려 곶감이 되기를 기다리는 풍경이 정겨웠다.여름이 한창인 이즘, 화암사 아랫마을 좁은 농사용 도로 사이로 복분자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반달 논 위로 부는 장마 바람에 벼 포기가 너울거린다. 인삼 밭과 들깨 밭 사이로 멀리 앞산의 푸름이 넘실댄다. 그 흔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 화암사 진입로는 과연 절로 가는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갈하고 깨끗하다. 17번 국도에서 벗어나 좁은 샛길로 한 10분 들어왔을까. 화암사 주차장이 계곡 옆 산자락에 덩그러니 공터로 남아 있다. 상점은 물론 화장실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숲속의 공터가 바로 화암사 입구. 일주문 대신 떡갈나무 숲길이 길손을 반긴다. 계곡을 따라 난 산길에 접어드니 울창한 숲 속 터널이다. 이 길은 요즈음 만든 길이 아니라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선객의 발걸음과 방문객의 수고로 만들어낸 역사의 흔적이다. 우마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산길엔 그늘의 시원함과 자연의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졸졸거리는 개울물이 정답고, 여름 한철 울어대는 매미의 합창이 정겹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온다. 그래도 절 오르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한참을 오르니 작은 폭포 하나가 물줄기를 쏟아낸다. 장마라고 해도 아직 장마다운 빗줄기가 내리지 않아 계곡의 물줄기가 그리 급하지 않건만 하얀 분말을 뿌리며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작은 폭포는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다.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시원한 그늘 솔바람이 금세 땀을 식혀준다. 역시 피서는 탁족이 최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발목부터 무릎 가슴 머리까지 시원하다. 다시 절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바위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철제 난간을 의지해 바위 고개를 오르다 아래를 바라보니 멀리 운주면 경천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니 이렇게 높이 올랐나 싶을 정도로 몸이 한 마리 새가 되어 허공을 날아오른다. 바위 아래 물길은 계곡 아래로 이어지고 바쁜 숨은 턱밑으로 차오른다. 언제쯤 나타날까 절은? 마음의 바람이 간절해질 때쯤 머리 위 키 큰 소나무 사이로 절이 눈에 들어온다.통나무 개울을 건너 보라색 수국이 화사하게 핀 절 마당에 들어서니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 현판의 고색창연한 누각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여태껏 땀 흘리며 올라온 계곡 위에 이런 선경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화암사는 산중에 핀 ‘한 송이 꽃’ 같은 절이었다.창건연대 화암사는 대둔산 남쪽 불명산 시루봉 중턱에 다소곳하게 감춰져 있는 전형적인 산지 가람이다. 요사 건너 산중턱에 서 있는 ‘화암사중창비’에 따르면 신라 원효와 의상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해 창건 시기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효나 의상이 과연 당시 그렇게 많은 사찰을 모두 창건하거나 그곳에서 공부했을까. 화암사 중수기에 연대가 정확히 기록돼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 23년(1297)부터 33년(1307)까지 사찰을 중창하고 조선 세종 7년(1425) 중건했으며 선조 5년(1572)에 또다시 극락전을 중수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본모습을 갖추고 지금의 이 자리에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전소하자 선조 38년(1605)에 극락전을 중건하고 광해군 2년(1610)에는 강당인 우화루(雨花樓)를 갖추어 오늘의 모습이 완성됐다.화암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락전(極樂殿)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국 목조 건축의 전형인 하앙식(下昻式)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이 하앙식 건축이 우리나라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극락전 발견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전파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일본으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일부 터무니없는 주장에 학계가 곤혹스러워 하던 터였다.하앙식 구조란 공포 위에 하앙이 경사(傾斜)로 얹혀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荷重)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 하중으로 눌러주게 돼 있어 처마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이 경감되게 만든 건축 기법이다. 이 건축은 중국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에 필요한 발달된 기법으로 백제 건축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전통의 건축 기법이 대처의 그 흔한 큰 사찰에서 단 한 채도 발견되지 않다가 이 산골짜기 산중턱 깊숙한 곳에서 보물찾기 하듯 숨겨져 있었으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하기야 17세기 당시 조선 건축에 이미 다포식 건축 기법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자유자재로 처마를 뽑아내고 내부 공간을 치장했으니 굳이 하앙식을 조선에서 차용하지 않아도 우리 산천의 크기에 걸맞은 아름답고 실용적인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앙식을 사용해 극락전을 지은 것은 오늘에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정면 3칸 측면 3칸인 극락전은 다포양식의 맞배집으로 전면공포의 하앙 단면이 용의 머리와 다리 형태로 투각돼 있는 반면, 건물 뒤로 보이는 하앙은 창같이 끝을 뾰족하게 깎아 경사지게 내리꽂고 있다. 극락전 내부는 불단 위에는 아(亞)자형 물림닫집을 설치해 장엄을 더하였는데 헛기둥과 화려한 공포대, 운룡(雲龍) 등의 장식으로 천궁(天宮)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보물 663호다. 화암사는 전형적인 산지 사찰로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누각인 우화루를 세우고 요사와 전각을 지어 ‘ㅁ’자형 마당을 두었다. 마당이라 해도 사방 80자 내외의 작은 공간이니 산중에 초파일이나 백중날 같은 대중법회라도 하려면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누각은 가능하면 마당의 높이와 비슷하게 마루를 내어 마당 영역을 넓혔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의 기둥을 덤벙주초 위에 두고 축대에 의지해 건축됐지만 안마당에서 보면 단층의 팔작집이다. 우화루는 이러한 공간 구성에 충실한 교과서 같은 전형을 보여준다. 보물 662호다.적묵당 요사 툇마루에 걸터앉아 우화루를 바라본다. 세월에 결이 삭을 대로 삭은 목어(木魚) 한 마리가 덩그러니 툇간 위에 매달려 있다. 화암사 목어는 마곡사 대적광전 옆 요사 툇마루 위에 걸렸던 빛바랜 목어와 선암사 큰절 뒤 암자 누각에 걸린 오래된 목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어 가운데 하나다.그리 크지도 않고 화려한 단청도 없이 백골(白骨)의 목리(木理)도 세월의 바람결에 모두 사라지고 이제 그 형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화암사를 찾아가면서 그 목어를 다시 구경할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또 반가웠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아름다운 전통 문화유산을 올곧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이 음력 유월 초하루다. 어디서 왔는지 시골 아낙네와 노보살들이 적묵당 공양간에 북적인다. 아마 초하루 불공을 드리러 온 모양이다. 저마다 얼굴에는 환희와 불심으로 가득하다. 몇몇은 서둘러 산을 내려가고 몇몇은 공양간 문을 열어젖히고 매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마루 바람을 쐬고 있다. 나는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명부전 너머 산자락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참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보살들은 한담을 하다가 흥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댄다. 유행가 가사 같기도 하고 여학교 시절 부르던 가곡 같기도 하다. 중년의 젊음이 오후의 여흥으로 바뀌고 있다. 극락전 앞마당에 햇살이 반듯하게 내린다. 극락전 후불탱화 부처님 얼굴 같은 노스님은 말없이 산을 내려가는 신도들을 배웅하고 다시 요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산중이 적막해진다.우화루 앞 연보랏빛 수국 위로 매미 소리가 더욱 요란하다. 후원 한 칸짜리 산신각을 지나 뒷산을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니 화암사가 연꽃 봉우리에 감싼 듯 뺑 돌린 산자락에 폭 쌓여 있다. 그 사이 한 마리 꾀꼬리가 대각선을 그리며 계곡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초록 천지 위에 노란 꾀꼬리 그림자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선승의 득도도 이러했을까.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꾀꼬리는 보이지 않고 멀리 화암사와 초록의 여름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화암사 우화루 누각 전경-불명산 계곡을 끼고 울창한 숲 산길을 땀흘려 오르면 화암사가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색창연하다.우화루 누각에 걸린 ‘불명산 화암사’ 현판- 조선 글씨 맛이 중후하다.우화루- 누각을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마루를 내어 마당을 확장한 선인의 지혜가 돋보인다. ‘꽃비 내리는 누각(雨花樓)’이라는 이름도 건축만큼 아름답다.화암사 목어-해탈한 선승의 분신을 보는 듯 처연하기도 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극락전 하앙- 전형적인 중국식 건축 기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까래 아래 비어져 나온 하앙을 용머리로 깎아 전각의 장엄을 더했다.화암사 전경- 불명산 봉우리로 빙 둘러친 가운데 꽃 한송이처럼 자리했다. 좁은 산중에도 후원 채마밭에 예쁘게 자라는 가지 오이 상추며 고추가 정답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