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4월 필리핀 남양군도. 황규완 석경고미술연구소 소장은 벌써 14년째 이곳에서 해저 유물 탐사를 벌이고 있었다. 2~3년이면 충분할 것 같았던 그의 탐사 작업은 침몰 지점을 찾아내는 데만 수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해저 유물 탐사에 들어간 비용은 당초 계획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도에 포기하기엔 지금까지 들인 자금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이날도 어김없이 그는 산소통 몇 개를 짊어지고 심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필리핀 남양군도는 남태평양의 비경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 바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절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주머니 사정이 녹록하지 않았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그는 대원들과 함께 한달 째 생선회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잠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제안한 생선 요리가 식탁 위에 한 달 내내 올라올 줄이야….이날도 그와 대원들은 허기진 배를 커피 한 잔으로 달래며 예상 침몰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국 원대 무역선이 지나던 길목.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침몰된 배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와 대원들은 수색에 들어갔다. 수백 년간 모래와 개펄 속에 묻혀 있는 배를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 이날도 황 소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랫바닥을 더듬었다. 1시간 쯤 흘렀을까. 그의 손에 뭔가 묵직한 게 잡혔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모랫바닥을 파보니 손바닥만 한 접시가 나왔다. 순간 그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윽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10여 년간 이역만리에서 고생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원나라 시대 무역선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역선을 인양하는 작업은 수색만큼 어렵다. 배의 3곳에 줄을 매달아 균형을 맞춰 개펄에서 배를 끌어내야 하기 때문. 만약 균형이 맞지 않으면 인양하는 중에 배가 파손될 수도 있다. 그의 보물선 인양 작업은 성공리에 끝났다. 보물선을 인양하는 데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대가로 그는 800만 달러와 자신감이라는 두 가지 보물을 함께 건져냈다. 필리핀 해저 탐사에서 그는 여러 진귀한 보물을 인양했으며 그중 중국 원나라 시대에 제작된 청화백자는 중국에서도 국보급으로 꼽히는 보물이다. 이 청화백자는 2004년 7월 런던 크리스티 도자기 경매에서 1568만여 파운드(289억 원)에 낙찰된 청화백자보다 100여 년이 앞서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이 청화백자가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에 출품될 경우 1000억 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은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 딱 3점만 남아 있다.고미술품계에서 황 소장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한다. 정식으로 미술사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40여 년간 고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쌓은 내공이 어지간한 한국 미술사 전공자를 앞선다는 평가다.황 소장의 수집 취미는 10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면장을 지내면서 집에 우편물이 많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죠.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도 갖고 있었습니다. 문위우표는 1884년 고종황제 칙령으로 설치된 우정총국이 찍어낸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입니다.” 우표 수집이 상당한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수집 대상을 화폐, 골동품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황 소장은 이때를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던 때’라고 술회했다.“돈 되는 물건을 찾자는 생각만으로 원칙도 없이 물건을 수집했습니다. 그런 뒤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한 기업체 사장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죠. 그런데 의외로 아무 말씀이 없었어요. 후에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수집을 여기서 중단하든가, 계속하려면 지금 갖고 있는 미술품을 모두 버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죠.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제가 수집하던 미술품은 투자 원칙이 정립돼 있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메리트도 없었죠.”이 일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던져줬다. 고미술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도자기를 공부하기 위해 그는 이천, 양평 등지 가마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도 그는 고미술품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술품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집 품목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도자기, 서화, 공예, 민화, 가구 등 고미술품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황 소장의 생각이다.“나만의 수집 분야를 정하고 이에 대해 깊숙이 연구하면서 수집에 몰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 적성에 맞는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주위에 가급적 조언자를 많이 둘 것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이와 함께 그는 희소성 있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고미술 투자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고려시대=청자’, ‘조선시대=백자’ 등 고정관념을 깨고 각 시대별 희소성 있는 작품을 구입하면 추후 엄청난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중국을 통해 국내로 유입되고 있는 북한 고미술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그는 한때 고미술품 전시 기획자로도 활동했다. 1970년부터 7년간 신세계, 미도파, 가고파 백화점 등에서 대규모 고미술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당시 제가 기획했던 고미술 전시회는 주요 백화점 정기 행사의 단골 메뉴였습니다. 보통 500여 점을 출품했는데 전시회 첫날 모두 다 팔릴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전시회를 열기 위한 자금을 주위에서 십시일반으로 빌렸는데, 지금으로 치면 펀딩을 한 셈이죠.”지난 2003년에는 16~19세기 러시아정교회의 성화들을 수집해 러시아성화전을 열기도 했다. 당시 전시된 성화는 주로 러시아정교회에서 성자들을 표현한 그림들로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는 왕이나 귀족들이 선물용으로 그린 리사 성화가 주로 전시됐었다.요즘도 그는 국내외를 넘나들며 고미술품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6월 중순에도 그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고려청자를 구하기 위해 티베트를 방문했다.“한때 티베트는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줬을 정도로 국력이 막강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우리의 고려청자들이 티베트로 많이 넘어갔었죠. 몇 해 전 우연히 고려시대 귀족들이 쓰던 타구(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가 티베트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현지를 방문하니 정말 고려시대에 제작된 유물이더군요. 주목할 것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13세기 고려청자에는 양각 기법이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유물은 양각 기법으로 제작된 금채청자(표면에 금채로 무늬를 넣은 상감청자)였습니다. 상감금채청자는 중국에서 몇 점 발견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마침 그에겐 몇 해 전 중국 변방을 돌다가 우연히 수집한 티베트 유물 한 점이 있었다. 검은색 돌에 호법신(護法神)을 조각한 마할 칼라라는 이 유물은 우리에겐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티베트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재 그는 마할 칼라와 고려 상감 금채청자의 맞교환을 위해 티베트 정부와 한창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유물은 국내에서는 바로 국보급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전 모든 유물은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해외에 방치돼 있는 우리 유물을 찾는 데 좀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그는 요즘도 해외에서 고미술 자료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거미줄 같은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방치돼 있는 우리 유물을 찾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좋은 고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심미안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인터뷰 도중 황 소장은 작품 보는 눈을 기르지 못해 낭패를 당한 경험도 털어놓았다. “1970년대 후반 마포의 모 재력가를 만나 서화 100여 점을 구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돈 150만 원에 모든 작품을 구입했더니 매도인이 추사 김정희의 모조품이라며 작품 하나를 덤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학산(友鶴山)’이라고 씌어 있는 작품이었는데 모조품이라는 생각에 집에 놀러온 선배에게 아무 생각 없이 선물했습니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관련 학계에 추사 김정희 연구를 지시해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추사에 관련된 작품을 찾던 중 당시 고려대 철학과 김충렬 교수가 ‘우학산’이라고 씌어 있는 작품을 찾아야만 추사체가 하나로 완성된다면서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조품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바로 김 교수가 애타게 찾았던 작품이었죠. 수소문 끝에 작품의 행방을 찾았지만 이미 해외로 반출된 뒤였습니다.”요즘 그는 그림 그리기에도 공을 쏟고 있다. 그중에서도 달 항아리를 놓고 그는 수년째 캔버스 위에서 씨름하고 있다. 달 항아리는 소박하고 인심 좋은 한국인의 정서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도자기다. 1년 6개월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2006년 3월 한국미술특별전과 5월 프랑스 오쉬 비엔날레에서 달 항아리 특별전을 가졌다. 이 밖에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주불 한국대사관과 주불 한국문화원, 태국 방콕에 자리한 유엔 산하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 등에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나만의 수집 분야를 정하고 이에 대해 깊숙이 연구하면서 수집에 몰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 적성에 맞는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주위에 조언자를 많이 둘 것도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