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5∼6년 후에 삼성과 한국 경제가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이건희 회장의 최근 발언은 한동안 잠잠했던 한국 경제 위기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최근 거론되는 위기론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들이 미래에 먹고 살 ‘성장 대안 부재론’이다. 또 일본 등 선진국이 견제하고 중국 등 후발국이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도 가세하고 있다. 이 밖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꼭 10년째를 맞아 위기가 반복된다는 ‘외환위기 10년 주기설’도 나돈다.통상 국제 금융사들이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들의 위기 극복 정도를 평가하는 데에는 ‘위기 3단계론’을 적용한다. 한 나라의 위기는 외환보유고 등에 금이 가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한국처럼 담보 관행이 일반화된 국가에서는 경제 시스템 위기로 비화된다. 돈을 공급해 주는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는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물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수순을 거쳐야 한다. 우선 외화 유동성을 확보해 대외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위기를 촉발한 부실을 털어내야 경제 시스템의 복원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경제가 안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다행히 한국은 위기 초기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 외자 유치 정책으로 여타 위기 경험국에 비해 외화유동성을 빨리 확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외화유동성 확보 이후다. 실물경기가 회복되고 경제 내에서 위기에 대한 우려가 불식될 수 있느냐는 얼마나 빨리 유동성 위기를 낳게 한 시스템 위기를 치유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대부분 위기 경험국들은 외화유동성 위기를 해결한 후 시스템 위기를 극복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외화유동성을 확보한 이후 잦은 정책 변경과 정부 혹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등으로 시스템 위기 극복이 지연되고 실물경기의 침체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비판론의 골자다.한국의 경제 각료들이 조기에 극복했다고 자평하고 있는 유동성 위기도 일부 국제 금융사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한 나라의 유동성 위기는 거시경제 차원에서 외화유동성이 부족해 발생하는 위기(macro crisis)와 개별 경제 주체의 현금흐름상에 문제가 생기는 위기(micro crisis)로 구분된다. 한국의 유동성 위기 극복은 엄격히 따지면 거시경제 차원의 외화유동성 위기를 카드 발행 등을 통해 개별 경제 주체들의 위기로 전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회의론자들의 지적이다.문제는 시스템 위기와 실물경기 위기 극복이 지연되면 될수록 각종 착시 현상에 따른 투기적인 요인들이 커지는 대신 위기 불감증에 따라 대처 능력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최근 원화 가치가 경제 여건에 비해 고평가되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거품이 낀 것이 대표적인 예다.경제 여건이 뒤따르지 않는 고평가 요인들이 글로벌 펀드들의 차익 실현으로 이어질 경우 국내외 자금들의 해외 이탈로 연결되면서 외화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가 다시 높아지게 된다. 이는 오래 전부터 국제 금융시장에서 하나의 정형화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위기 재귀설(crisis reflexibility)’이다.결국 요즘 들어 우리 경제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위기론이 다시 대두되는 것은 ‘통계수치의 위기’가 아니라 정부의 경제 운용 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 시스템의 위기’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우리 경제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 진단을 토대로 정책 당국은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우리 경제의 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만약 현 정부가 올해 말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예산의 조기 집행 등과 같은 단기적인 부양책만을 실시할 경우 그동안 누누이 지적돼 온 우리 경제의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개선하는 일은 요원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