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서 영화 007시리즈만큼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인기를 얻은 작품도 흔치 않다. 이 영화는 첩보전이라는 박진감 넘치는 소재에 제임스 본드의 남성미와 본드 걸의 여성미를 절묘하게 결합해 시종일관 관객들을 긴장 속으로 몰고 간다.영화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화 007은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의 배경은 물론 사용되는 제품 하나하나가 당시로선 파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임스 본드의 ‘애마’였던 본드 카는 영화 007을 블록버스터로 키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본드는 꿈의 자동차인 본드 카를 망가뜨리기 일쑤다.그러나 처음부터 본드 카의 비중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007시리즈인 ‘살인번호(Dr. No)’에 등장한 본드 카는 평범한 운송 수단에 불과했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1961년식 선빔 알파인 로드스터를 타고 등장하는데 이 차가 최초의 본드 카로 기록된다. 나중에 크라이슬러에 인수된 선빔은 자동차 역사상 시속 321.8km를 주파한 최초의 슈퍼 카로 당시 영국 자동차 기술의 결정체였다. 선빔의 초기 제품인 1961년 MKII 시리즈5는 밝은 청색의 오픈카로 1592cc 4개의 실린더로 구성된 엔진이 탑재돼 있다. 두 번째 시리즈인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 제임스 본드는 4.5리터 벤틀리 마크 4를 탄다. 이 자동차는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생산된 자동차로 6기통 4257cc,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 엔진이 장착됐으며 16인치 타이어에 최고 출력이 132마력까지 나온다. 이 차는 당시 부유층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자동차로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이 가장 타고 싶어 하는 자동차였다는 후문도 전해진다.본드 카는 3탄 ‘골드핑거(Goldfinger)’부터 서서히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벤틀리 마크 4가 단종되자 이안 플레밍의 시선은 영국 자동차 애스턴 마틴으로 옮겨갔다. 영화 속에서 신무기 개발자인 Q는 제임스 본드에게 재규어 3.4와 애스턴 마틴 DB5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주문하고 이에 제임스 본드가 애스턴 마틴을 낙점하는 장면은 원작자 이안 플레밍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애스턴 마틴이 제임스 본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골드핑거’는 애스턴 마틴의 등장뿐만 아니라 본드 카의 역사를 새롭게 쓴 작품으로 기록된다. 기존에 선보인 자동차들이 운송 수단에 불과했다면 ‘골드핑거’부터 나온 자동차들은 제임스 본드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분신으로 역할이 격상됐다. 후미등에 있는 두 개의 기관총이 불을 뿜고 배기구에서 최루가스가 배출되며 후면에 이동식 금속 방탄막, 휠 가운데에는 옆 차 타이어를 찢는 고리 등의 장치가 장착된 것은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시도였다. ‘골드핑거’의 성공으로 애스턴 마틴 DB5는 4탄인 ‘선더볼(Thunderball)’에서도 본드 카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 차는 6기통 4000cc 엔진과 5단 기어를 장착했으며 최고 282마력, 최고 속도 시속 241km인 슈퍼 카였다. 영화 007의 성공은 애스턴 마틴에도 엄청난 부를 안겨다 줘 ‘골드핑거’ 개봉 이후 애스턴 마틴 DB5는 부유층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는 ‘골든아이’를 본 직후 애스턴 마틴 DB5를 구입했다는 일화도 있다. 1965년 애스턴 마틴 DB5는 지난해 소더비 경매에서 190만 달러(18억 원)에 낙찰되는 등 ‘골드핑거’ 향수에 젖은 클래식 카 마니아들에게 아직까지 예전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애스턴 마틴 DB5는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에서도 놀라운 성능을 과시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10탄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12탄 ‘포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에서는 영국산 스포츠카 로터스(Lotus) 에스프리가 처음 선보였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5.6초였다. 에스프리가 본드 카로 선택된 에피소드도 재미있다.경쟁사인 애스턴 마틴이 본드 카로 명성을 떨치자 엄청난 영업 손실을 입던 로터스는 본드 카에 회사의 사활을 걸게 된다. 우선 로터스는 영화 제작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영화 007이 제작되던 런던 파인우드 스튜디오 앞에 신형 에스프리를 주차했다. 주위의 시선을 끈 것은 당연한 일. 차를 둘러싼 군중 가운데는 제작자인 커비 브로콜리도 있었다. 결국 에스프리는 새로운 본드 카로 낙점 받았다. 영화에서 사용된 에스프리 V8 모델에는 차 뒤쪽 4개의 스프레이에서 시멘트가 발사되며 영화사상 최초로 수륙 양용 자동차로 사용된다. 수중에서 어뢰를 쏘고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며 어뢰를 제거하는 신무기도 선보였다. 자동차가 바다 속을 달린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영화 007에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제임스 본드는 15탄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에선 다시 애스턴 마틴으로 갈아탄다. 로터스의 반격에 고심하던 애스턴 마틴은 기존 모델인 DB5보다 업그레이드된 1986년식 볼란트 V8을 영화 속에 등장시킨 것이다. 이 차는 8기통 32 밸브 5340cc의 후륜구동 방식 엔진으로 최고 350마력에 최고 속도가 시속 240km까지 나온다. 차체를 방탄으로 처리했고 미사일, 레이저는 기본이며 주파수를 추적하는 통신장비까지 갖춰져 있다.MI6(영국 첩보부) 소속 첩보 요원을 소재로 다뤄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 속 본드 카는 영국 자동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본드 카=영국 자동차’라는 등식은 17편 ‘골든아이’에 와서 깨지기 시작했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들이 간접광고(PPL)를 의식해 자동차 협찬사로 참여하고 나섰으며 결국 본드 카의 영예는 독일 BMW가 차지했다.영화에 나온 Z3 로드스터는 V8 3500cc 엔진이 장착돼 있으며 최고 속도가 시속 195km까지 나온다. 주행 성능은 기존 본드 카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영화에서 이 차는 스팅어 미사일과 레이더, 시트 탈출 장치 등이 장착돼 있다. 한 번의 출현으로 엄청난 판매액을 기록하자 BMW는 18탄 ‘네버다이(Tomorrow Never Dies)’와 19탄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를 위해 750IL과 Z8을 제작하고 영화 출시와 함께 공식 런칭했다. 영화 속 750IL에는 자기 수류탄, 최루가스 외에도 충전이 가능한 타이어 등 기발한 장치들이 많이 등장했다. 양산형 모델인 750IL은 V12 5400cc가 장착된 BMW 최고급 세단으로 안티로크브레이크시스템(ABS), 올 트랙션 시스템, 제논 헤드라이트, 강우 감지 센서 등 다양한 첨단 장비가 장착돼 있는 자동차다. Z8 역시 마찬가지다.2인승 로드스터인 이 차에는 V8 5000cc 엔진이 탑재돼 있으며 최고 속도가 시속 249km까지 나온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은 4.7초다. BMW에 본드 카 자리를 내준 애스턴 마틴은 절치부심 끝에 20탄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를 통해 화려하게 복귀한다. 애스턴 마틴이 판매하는 자동차 중 가장 비싼 모델인 V12 뱅퀴시에는 V12 6.0리터 DOHC엔진을 얹었으며 최고 출력은 466마력으로 정지부터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4.7초다.최신작인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가 어떻게 첩보원이 됐는지가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어 최첨단 본드 카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 포드자동차 계열의 애스턴 마틴(영화 제작 당시 포드 계열이었던 애스턴 마틴은 지난 3월 영국 투자컨소시엄에 재매각됐다)과 몬데오 등이 한꺼번에 등장했다는 점은 전 편과 다른 부분이다. 자동차 협찬권을 따내기 위해 포드 측은 제작사에 당시 1400만 파운드(약 240억 원)를 지불했다는 후문도 들린다.본드 카는 비단 영화사뿐만 아니라 자동차 기술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장치들은 상영 당시만 해도 꿈의 기술이었지만 추후 수많은 발명가들의 노력에 의해 실제 제품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애스턴 마틴 DB5의 경우 3탄 ‘골드핑거’에서 악당의 위치를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처음 선보였다. 1957년 소련의 위성 발사 성공 이후 미국 MIT공대 교수들은 무선 신호를 추적하는 기술을 선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7년 미 해군은 전 세계 잠수함의 위치를 찾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어 1973년 미 국방부는 이를 군사 차량으로 확대하기 위해 120억 달러를 들여 내브스타 GPS(Nav star Global Positioning System)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GPS의 시초다. 5탄 ‘두 번 산다’에 등장한 도요타 2000 GT는 영화 속에서 번호판 뒤 카메라와 무선 전화, 음성작동식 카세트, 비디오폰 등이 탑재돼 있다. 지금 와서 보면 평범한 이 제품들은 당시로선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들이었다.‘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나온 AMC 호넷은 비행기로 변신한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로 기록된다. 이 같은 공륙(空陸) 양용 자동차는 지난 1997년 미국의 올턴 테일러가 1만2000피트에서 시속 217km로 주행할 수 있는 에어로카를 개발하면서 현실 속에서 재현됐다. 또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로터스 에스프리는 바다와 육상에서 모두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로 1992년 타르코사가 바이오닉 돌핀이라는 수중 자동차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한 것임을 입증했다.이 밖에도 로터스 에스프리는 지금은 너무도 흔한 장치가 돼 버린 도난 방지 시스템을 처음 탑재한 자동차이며 BMW 750IL에는 원격 조작 장치가 처음으로 장착됐다. 전문가들은 20탄 ‘어나더 데이’에 등장한 사라지는 자동차 기술도 5년 이내에 양산형 모델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차체에 장착된 수천 개의 디지털 카메라가 주의의 영상을 재생하면 마치 눈앞에서 사라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