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라디오 스타’ 오미희.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 따스한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그녀가 돌아왔다. 아픔과 번민으로 가득하던 지난날이 삶의 가장 큰 재산이 됐다고 말하는 그녀. 두 번의 이혼, 전남편과의 법정 싸움, 암 투병 등 굴곡의 인생을 살았던 오미희가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보자.“내 인생은 마라톤 풀코스상처입은 사람 희망 주고파”3년 전, 라디오 스튜디오 안. 당시 명 DJ로 이름을 날리던 오미희는 한창 떠오르는 가수였던 비를 게스트로 맞았다. 방송 도중 “가을에 어머니한테 어떤 선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답을 들었다. 실로 난감했다. 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미안함에 당황하며 노래가 나가는 동안 사과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 방송이 끝나고 비는 오히려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매니저에 전했다. 결국 비는 예정에 없던 세 번을 더 출연했고 나이를 초월한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됐다.“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제작한 ‘세계적인 스타, 비를 만든 일곱 사람’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 일곱 사람 중에 제 이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죠. 사람들은 제가 비와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 비를 3년 전 방송을 하며 잠깐 본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비는 그 짧은 만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저를 엄마같이 여긴 모양이에요.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비가 저를 보며 ‘미래 이상형에 관한 힌트’를 얻었다고 했을 때 정말 뿌듯했죠.”말실수를 했다 싶어 미안한 마음에 소낙비처럼 쏟아냈던 따뜻한 말들이 비의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그 이후 비는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오미희에게 안부 전화를 건다. 그녀는 “그때 비는 내 말을 한마디도 흘리지 않고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남의 말을 잘 듣고 감정을 잘 헤아리기 때문에 그것을 춤과 노래, 연기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같아요”라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오미희는 그 누구와의 짧은 만남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소중히 여겼다. 이런 신념은 그녀에게 수많은 좋은 인연들을 선물로 안겨다 줬다. 바람 잘 날 없던 과거의 악몽을 모두 헤치고 일어나 오뚝이처럼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도 ‘관계의 힘’이 가장 컸다.유방암에 맞서 싸우며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라디오의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시절, 뜻하지 않던 조력자로 인해 가슴 뭉클한 적도 있었다. “제 투병 생활이 세간에 알려지자 애청자 한 사람이 직접 잠옷을 곱게 만들어 보내왔어요. 잠옷과 함께 온 쪽지엔 ‘청취자로서 오미희 씨에게 위로받았던 것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보냅니다’라고 쓰여 있었죠. 그걸 보자마자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그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진실은 사람을 울리게 하는 거라는 걸 깊이 깨닫게 됐죠.”조용히 말을 하던 오미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뚝뚝 떨어지는 눈물.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온 그녀이기에, 눈물도 많아졌으리라. 한참을 울고 난 그녀는 “마음 놓고 울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며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1979년 MBC공채 탤런트로 출발한 그녀지만, 연기보다는 청취자와 만나는 DJ 오미희로 대중에게 더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녀 자신도 “연기보다는 DJ가 더 잘 맞는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성실과 진실은 닿는다’고 여긴다. 이 믿음은 그녀가 30여 년간 ‘라디오의 히로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라디오는 가장 솔직한 매체이자 청취자와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매체예요. 인간성 좋은 천사과도 아닌 제가 능력 있는 DJ로 널리 기억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일이죠. 라디오 청취자는 PD보다 많은 프로그램을 들어요. 나보다 똑똑한 청취자들에게 실수했을 때 정중히 사과하고 솔직담백하게 진행하는 것이 장수 비결이라고나 할까요.”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시 대중 앞에 컴백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연기에 승부수를 띄웠다. 줄곧 라디오 일만 해온 터라, 거의 10년 만에 도전해 보는 연기는 그녀에게 쉽지만은 않았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스승의 은혜’ ‘언니가 간다’와 드라마 ‘궁S’에 연달아 출연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누가 봐도 저는 초짜 신인 배우예요. 전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해요. 노력해 봤지만 촬영장에서 감독님께 답답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죠. 어떤 느낌으로 임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힘들더군요.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어요. 제게는 다른 곳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믿었거든요. 전 실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에 소질이 있어요. 제 목소리로, 느낌으로 족한 일들을 할 때가 더 행복하죠.”오미희는 요즘 그녀의 이런 탤런트를 살려 세 가지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기독교 방송의 간증 프로그램인 ‘새롭게 하소서’와 기독교 라디오 방송의 ‘오미희의 행복한 동행’, 그리고 온누리 교회 TV의 ‘아버지 사랑합니다’가 그것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이 방송들을 진행하며 울고 웃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암 투병을 하면서 남동생의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됐어요. 그 이후로 기독교 방송과 인연을 맺어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죠. 방송을 하며 오히려 제가 더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제공받는 느낌이랍니다.”험한 인생살이를 통해 ‘전쟁의 폐허에서 목숨만 살아나온 느낌’이었던 그녀는 남을 돕는 일에도 앞장선다. 구순구개열(입술이 갈라진 기형 증상으로 ‘언청이’라고도 한다)로 태어난 어린이들과 수술비를 댈 수 있는 후원자를 연결해 주는 일이다.“세상은 바늘과 실로 연결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주변의 부자들과 진짜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일을 할 뿐이죠. 착한 일하고 싶은 부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제가 부자가 되면 직접 하겠지만, 사실 연예인 중엔 돈이 많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내가 돈이 있으면 언젠간 도울 거야’라는 생각보다 작지만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그녀가 어려울 때 힘이 돼줬던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브라질의 마라톤 선수 ‘리마’라는 것. 리마는 지난 2004년 시드니올림픽 마지막 날에 벌어진 마라톤에 참가해 괴한의 피습으로 억울하게 선두를 빼앗긴 뒤에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결승선을 통과했던 선수였다.“1위로 달리던 리마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괴한 때문에 아쉽게 금메달을 놓쳤잖아요. 보통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억울해서 뛰지도 못했을 텐데 리마는 두 팔을 벌린 비행 세리머니까지 펼치며 환한 미소로 코스를 완주해내더군요. 그 장면을 본 직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해 한참을 울고 나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신은 누구에게나 마라톤 풀코스를 제공하며, 내가 뛰는 풀코스라고 해서 도중에 괴한이 갑자기 뛰어들지 말란 법은 없다는 거죠.”그때의 감동이 떠오른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점점 예뻐지는 것 같다. 데이트 중인 사람이라도 있나 보다”고 농을 던졌다. 이내 얼굴이 밝아지며 활짝 웃는 천상 여자 오미희.“얼마 전 친한 후배인 최명길이 전화를 걸어 ‘좋은 일 있지?’ 라고 떠보더라고요. 다 큰 우리 딸도 ‘이제는 엄마도 데이트 좀 해’라고 하고요. 제가 봐도 전 늙어가는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해요. 혼자 살기엔 좀 아깝죠?(웃음)” 오미희는 인터뷰 중에도 옷을 여러 벌 갈아입으며 다양한 포즈와 백만 가지 표정을 지어보이는 등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줬다.“한때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야’라며 불평도 해봤죠. 그런데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이젠 알아요. 리마처럼 인생의 풀코스를 꾸준히 달려 비록 1등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남을 수 있을 만한 생을 살고 싶어요. 어려웠던 시간들이 지금 제게는 약이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론 제 경험을 토대로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로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