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과 퍼스트레이디

어느 워크숍에서 강의 중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대통령의 부인은 ‘영부인’이니, 만약 여자 대통령이라면 그 남편은 ‘영남편’인가 하는 질문이었다.호칭(呼稱)이란 어떤 사람을 직접 부르는 것이고 지칭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을 통칭하여 칭호(稱號)라고 한다. 우선 영부인이란 대통령의 부인을 말하는 지칭어가 아니며 더욱이 영남편이라는 말은 없다. 영부인(令夫人)이란 단어의 사전적 풀이를 살펴보면 ‘지체 높은 사람의 아내를 높여 일컫는 말’로 되어 있다. 즉 상대의 부인을 높여 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다. 상대와 대화 도중에 면전에서 직접 그의 부인을 부르는 말(호칭, your esteemed wife/당신의 아내, 영부인)인 데도 대통령 부인의 지칭어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에게만 영부인이란 칭호를 사용하도록 금기시했고 언론 매체의 무책임한 오용과 전파가 오늘의 혼란을 자초한 것 같다. 각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전에는 고위직이나 군 장성도 각하라고 불렸으며 박 대통령도 장군 시절에 즐겼던 호칭이지만, 후일에 대통령 외에는 사용을 금기시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각하 역시 높여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성격이 좀 다르나 ‘동무’라는 말도 보통의 용어이지만 북한에서 특수하게 사용하다 보니까 우리 측에서 금기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자녀의 호칭은 나의 자녀라면 아들과 딸로 칭하나, 상대방에게는 아드님 혹은 따님이라고 예우한다. 한문식은 내 쪽은 자식과 여식이나, 상대방의 자녀는 영식(令息)과 영애(令愛)다.자기 집사람을 남에게는 안사람 혹은 아내라고 칭하나, 상대방의 아내라면 안어른이나 영부인(令夫人)으로 예우한다. 영부인을 대통령의 부인으로 잘못 알다 보니, 대통령(大統領)의 령(領)자를 써 영부인(領夫人)이라는 억지 주장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여성대통령일 때 그 남편은 영남편(領男便)이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령(領)자는 ‘거느릴 령(영)이고’, 영부인의 영(令)자는 ‘하여금 영(령)’으로 남을 높여 부를 때 붙이는 접두사일 뿐이다. 따라서 영부인이란 대통령의 부인이 아닌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보통 쓰이는 용어다.상대방의 남편을 높여서 부르는 호칭은 바깥어른, 부군이니 여성 대통령의 남편이라면 ‘○ 대통령의 부군’ 쯤이 무난할 것이다.부인(夫人)이라는 호칭도 높임말이다. 본래 천자의 첩이나 제후의 아내를 호칭한 것이었으며, ‘○품 부인’이라 부르는 봉작을 받은 부인(婦人)에 대한 봉호를 칭하는 등 경칭이다. 참고로 대원군의 아내는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그리 불리었다.영(令)은 남의 아버지를 높여서 영존(令尊), 남의 아들과 딸을 높여 영식 혹은 영애라고 하듯이 남의 친속을 높일 때에 쓰인다. 그래서 옆집 아주머니나 직장 상사의 아내 등 기혼 여성이면 누구나 영부인의 칭호가 가능하다. 옛날에는 경칭으로 부인 외에도 영부인, 영실(令室), 내상(內相), 합부인(閤夫人) 등을 썼으나 거의 모두 사라지고 영부인만 남았다.따라서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를 영부인으로 번역하는 것은 큰 오류다. 영부인이란 특정인의 칭호가 아니므로 ‘○○○ 씨 영부인’ 또는 ‘○대통령의 부인’이어야 한다. 또 스승의 부인을 흔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나, 사모님이나 부인이 존칭의 감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영부인(令夫人)이라는 표현이 그 간격을 채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