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다. 모처럼 붓을 놓고 마음이 한가로워 책장에 묵혀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 보았다. 벽암록(碧巖錄), 조사들의 선문답을 적어놓은 책이다. 대학시절부터 읽어보려고 틈틈이 책장을 넘겼지만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떠듬거리며 책장을 넘기다가 반가운 구절 하나가 눈에 들었다. 마삼근(麻三斤)….내가 평소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진 전문가가 있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마삼근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어수룩한 글씨에 문기가 서려 있기도 하고 선미(禪味)가 배어 있기도 했다. 뜻도 알 듯 모를 듯하여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도 잘 모른다는 대답이다. 다만 그의 부친이 당신의 서재에 걸어두었던 것을 옮겨왔다는 것만 일러줄 뿐이다. 그날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문제의 ‘마삼근’이 벽암록의 한 구절이었다는 걸 알아내고는 마치 우연히 길에서 황금덩이를 주운 것만큼이나 기뻤다.글의 내용은 동산스님이 어느 납자에게 부처가 뭐냐고 물으니 “마삼근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이다. 나는 아직도 그 깊은 뜻을 모른다. 다만 해제를 읽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짧은 불교에 대한 지식을 모아 더듬어 볼 뿐이다. 어찌됐든 간에 멋있는 말인 것 같아 빨간 색연필로 마삼근에 밑줄을 긋고 방점도 찍었다. 벽암록 서문에는 다음 같이 적혀 있다.설봉스님이 하루는 원숭이들을 보고 말하기를“원숭이가 각각 한 개의 옛 거울을 짊어지고 있구나!”하니 삼성스님이“숱한 세월 동안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 거울이라고 합니까?”하고 물었다. 설봉스님이“흠이 생겼구나!”하자 삼성스님이 말하기를“천오백 명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말귀도 못 알아들으십니까?”하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노승이 주지하기가 번거로워서…”알겠는가.비가 연잎을 적시니향기가 집에 떠돌고바람은 갈대 잎을 흔드는데눈은 배에 가득하네.아무리 읽어보아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이 벽암록 서문은 1993년 가야산에서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계실 때 선림고경총서를 간행하면서 쓴 것으로, 당대의 대 선지식이 쓴 서문이고 보면 분명 큰 뜻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장 대신 경허 스님의 선시가 읽기 쉽고 내용도 간결해 좋았다.빈 절에서 해 저물도록 斜陽空寺裡끝없이 졸고 있는데 抱膝打閒眠어디서 우수수 소리 蕭蕭驚覺了깨어보니 낙엽만 쌓였네. 霜葉滿 前선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마음이 울울하면 훌쩍 달려가 삼성각 마루에 가부좌하고 하염없이 긴 봄 햇살을 바라보기도 하고, 한여름 대웅전 앞 고목 숲 속 꾀꼬리울음소리에 정신이 맑게 빛나기도 했던 장곡사(長谷寺)가 생각났다. 가을 햇살이 가벼워지고 풀벌레 소리가 초롱초롱해 가을 깊이를 가늠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한 해를 마감하는 동짓달이 됐으니 삶은 유수라는 말이 더욱 실감난다.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번지. 장곡사는 동짓달 노루꼬리만큼 짧은 한낮의 햇살에 조용히 숨죽이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칠갑산 유행가 자락 콩밭 매는 아낙네, 삶의 설움에 콩 포기 심는 대신 눈물을 심는,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고된 노동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심심산골의 처녀가.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던 그곳.유행가 자락을 되새기며 천천히 걸어 장곡사에 올랐다. 금강 줄기 백마강의 서쪽이 청양이요 동쪽이 부여로 외지 사람 눈에는 그곳이 그곳 같아 보이지만 부여 사람들 보기에는 청양에서 시집오면 오지 중에 오지에서 왔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곳에 도로가 사방으로 나있고 신작로가 훤하다. 그래도 그 흔한 가든 하나 모텔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아직도 여기는 삶의 숨소리가 가파르지만은 않은 곳 같다.산지 사찰의 동적이고 신선한 구조 장곡사 입구는 깊지 않다. 그 흔한 계곡물도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사찰 진입로도 없다. 분명 산지 사찰인 데도 그다지 산속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아 절다운 깊이가 없어 보인다. 옛길의 정취를 모두 밀어버리고 새로 포장한 아스팔트 길이어서 그럴까. 절 아래 상가도 어설프고 아직 초짜 중 같이 절집 규모가 서글프기만 하다. 하지만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언덕을 돌아 누각 앞으로 올라가니 아담하고 아늑해 언제 그런 느낌이 들었나 싶을 정도다. 발 아래 한 뼘 밖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새삼 느낀다.12세기에 창건된 장곡사는 낮은 강당, 대웅전, 좌우의 요사채로 구성돼 충청도의 산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최소의 사찰 기본 단위를 이룬 배치다. 진입로 역시 대부분 백제계 사찰에서 보는 것 같이 강당인 운학루(雲鶴樓)를 돌아 옆으로 진입하게 돼 있다. 이 절의 공간적 이미지와 대조되는 서산 개심사가 정적이고 화려한 여성적 공간을 갖는 반면, 장곡사는 동적이고 신선한 남성적 공간감을 갖는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이 두 동(棟)으로 하대웅전(下大雄殿) 옆의 계단을 오르면 상대웅전(上大雄殿)이 나타난다. 두 건물의 건축 시기는 달라 상대웅전은 14세기, 하대웅전은 16세기 말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지의 좁은 터에서 암자식으로 운영하던 두개의 사찰이 확장 증축될 때 옛 건물과 새 건물의 두 영역을 연결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백제계 고려건축의 특성 상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박공지붕으로 14세기 주초와 기둥 형식에 18세기 지붕을 갖춘 복합구조를 갖추고 있다. 보물 162호. 기둥과 주두까지는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전형적인 주심포 형식이다. 그 위의 공포대도 주심포계를 따랐지만 기둥 사이 가운데에 공포를 하나씩 더 배열했다. 결과적으로 주심포에 다포가 삽입된 모양이고, 외관적으로는 다폿집이지만 다포계의 대표적 부재인 평방이 없고 실질적 뼈대는 주심포계다. 기둥 사이는 상당히 넓고 기둥은 상대적으로 짧아 보여 이른바 백제계 고려건축의 특성을 지녔다. 바닥은 원래 고려시대의 연화문방전(蓮花紋方塼)이 깔려 있었으나 대부분 일제시대에 반출됐고 일부만 남아있다. 건물 내부엔 정교히 조각된 석조대좌와 철조약사여래불(鐵造藥師如來佛)과 철조비로자나불(鐵造毘盧舍那佛) 그리고 소조아미타여래불(塑造阿彌陀如來佛)이 안치돼 있다.철조약사여래불은 광배, 대좌와 함께 국보 제58호다. 이 불상은 흔치 않은 방형 대좌에 앉아있는데, 네 귀퉁이에 귀꽃이 일어서서 고려 시대 석물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중 지대석 위에 귀꽃이 솟은 복련, 다시 세 단을 올라가서 중대석 네 면에는 한 면마다 두 구씩을 조각했다. 지대석 네 모서리에 기둥을 꽂은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목조불감 안에 봉안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은 한 손은 무릎 위에 얹고 또 한 손은 무릎 아래에 내리고 있으나 편 손 위에 약사발은 놓았던 자국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인상이 옆의 비로자나불만은 못하지만 단호한 표정과 당당한 신체가 당대의 새로운 이상이 깃들어 가는 현실적인 얼굴을 드러내 주고 있다. 광배는 옆의 불상처럼 나무광배를 해 달았다. 초기에는 석조광배가 있었겠지만 깨어진 뒤에 후대에 단 것일 것이다. 섬세한 나무 조각에 역동적인 색채를 과시하는 광배는 조선 시대 목각 기술의 유려함을 한껏 보여 준다.철조비로자나불은 상대웅전 안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불상이다. 왼손 검지를 올리고 오른손 엄지를 구부려 마주대고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을 하고 있다. 두 척 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높이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모습에 경직되고 험상스럽기조차 한 인상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부처의 상이 부드럽든 우악스럽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대개 자비로운 마음이 보이는 부처상을 대하다가 처음 보는 강한 느낌이 내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 9세기에 유행한 비로자나불 신앙을 받아들인 고려 전기의 불상이다. 보물 제 174호. 후대에 만들어진 나무광배는 불꽃 모양이 화려하게 솟아오르는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철조비로자나불 대좌는 석조로 석등 형식이다. 하대석·간주석·상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는데 긴 간주석에 정좌한 불상과 광배의 앉음새의 비례가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하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두 칸 다포계 맞배집이다. 보물 181호. 하대웅전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복장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1346년에 조성된 고려시대 불상이다. 얼굴 생김이나 어깨선이 부드럽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약사발의 모양이 뚜렷해서 약사불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좌와 광배는 없는데 높이가 3척 정도의 작은 불상이다. 법당 전체로 볼 때는 빈약한 감이 있어 원래부터 이 하대웅전에 있었던 것이 아닌 듯하다.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고 눈코입도 부드럽다. 옷은 어깨를 다 감싸는 통견이지만 가슴을 풀어 놓아 속옷이 들여다보인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보물 제 337호다.요사채 세월의 무게 장곡사 요사채인 설선당은 하대웅전의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의 무게를 지닌다. 쇠서가 우직하게 뻗어 나오는 미감에서 조선 전기 건축의 여운을 강하게 보여준다. 설선당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겸 부엌엔 검댕이의 진한 그을음이 대낮에도 내부를 컴컴하게 한다. 부엌 천장 목재 구성에 구불텅한 소나무 등걸을 그대로 사용한 대목의 마감 솜씨에서 조선시대 미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심사 요사채의 아름다움과 비견할만한 우수한 조선 건축이다. 웅진전 나한들의 유치하고도 천진난만한 표정은 어려운 구도의 길을 한껏 쉽게 풀어내어 보는 이의 마음을 금방 환하게 만든다. 운학루 법고와 목어에도 시간의 깊이를 깊숙이 감추고 있다.상대웅전 앞 고목의 느티나무 등걸에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빛이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에 동동 매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