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비뇽 여행
리나라 사람들만큼 남의 나라 역사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간혹 여행길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무척 세세한 역사적 사건까지 줄줄 외는 한국인들은 신기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아비뇽(Avignon)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도 이 지명을 들으면 금세 ‘아비뇽 유수’가 생각난다.색으로 표현하자면 아비뇽은 분명 연황톳빛 혹은 탁한 상아색을 머금은 도시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오랜 성곽에서부터 곳곳에서 만나는 유적과 옛 건물들, 그리고 작은 골목 한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빛깔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다 싶을 만큼 일관돼 있다. 그 덕분에 아비뇽은 오랜 시간의 흔적을 이어가기에 더 없이 좋다. 언젠가부터 신식 건물을 짓는 것이 금지돼 있는 이곳은 발길 닿는 곳마다 1000년 전 유럽의 맨얼굴과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묘한 매력에 빠지게 하는 도시, 그곳이 바로 아비뇽이다.아비뇽 여행은 크게 세 곳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비뇽 다리, 교황청, 그리고 구시가 등인데 5km 둘레로 축조된 성벽을 오가며 아비뇽을 둘러보게 된다. 아비뇽을 찾았을 때, 도시 전경이 한눈에 잡히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어딘지 굳건하면서도 폐쇄적이기까지 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이 성벽 때문이다. 이 성벽은 아비뇽에 머물렀던 교황들이 자신의 확고한 영역을, 황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치외법권 지역을 선포하기 위해 오랜 기간 쌓았다고 한다. 성곽에 나 있는 성문을 수많은 여행자들이 드나들며 론 강변의 이 작은 도시를 샅샅이 훑어보는데, 한여름 7월 한 달 동안만 해도 50여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몰려들 만큼 프로방스에서도 손꼽히는 여행지다.아비뇽을 찾아 온 여행객, 특히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은 교황청이다. 정확히 말해서 ‘교황궁’이라 불리는 이곳은 아비뇽 다리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대한 궁성의 규모를 자랑하는 유적이다.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프랑스 남부의 이 도시로 오게 된 것은 1305년 교황 클레망 5세(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황제 필리페 4세와 교권 문제를 상의한다는 구실로 로마행을 미루면서부터다. 그 뒤로 7명의 교황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머무르는 동안 아비뇽은 새로운 교황청이 있는 도시로 유럽 사회에 각인됐다. 70여년간 계속된 이 시기를 사람들은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는데, 교황 스스로가 자신의 궁성을 쌓고 유배도, 수형도 아닌 모호한 시간을 이어갔음을 비꼬는 이중적 의미가 깔려 있다.교황청 광장에서는 노천 카페와 크고 작은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린다. 교황궁은 높이 50m, 두께 4m의 거대한 벽에 둘러싸여 신궁과 구궁 두 채로 나뉘어 있다. 전체 면적은 약 1만5000㎡로 유럽 최대의 성채다. 고딕 양식이 주를 이루는 교황궁은 높다란 망루와 첨탑을 사방으로 두르고 있는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병영으로도 쓰였다. 교황의 집무실과 개인 처소, 대소 연회장 등이 섬세하고 거대한 태피스트리와 중세풍의 벽화, 화려한 천장 등으로 장식돼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대연회장과 벽난로가 있는 교황의 개인 공간 등에서는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질 정도다.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좀 냉정하게 말해서 아비뇽 교황궁은 멋스러운 선물상자로만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웅장한 궁성 안의 여러 공간들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황들이 머무를 때는 달랐겠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18세기 후반 국민의회의 ‘정화’작업으로 인해 성상이나 기타 장식물, 예술품 등이 파괴되거나 분실됐다. 대신 현재는 세계적 연극제인 아비뇽 국제연극축제에 공연됐던 주요 작품들의 무대 의상 등을 전시하는 장소로 이용되면서 텅 빈 공간의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사실 7명의 교황이 이곳에 거처할 때도 이 웅장한 성곽 밖에서는 ‘성스러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사가 써지고 있었다. 교황이 아비뇽을 치외법권 지역으로 선포하면서 프랑스는 물론 인근 유럽 지역의 범죄자, 부랑자 등이 아비뇽으로 속속 몰려들었고, 이곳은 온갖 향락과 범죄의 소굴로 변해갔다. 아비뇽은 면죄부와 성직을 돈으로 거래하는 주무대였다. 교황은 부자와 영주들에게 파문권으로 협박하며 거액의 기부금을 요구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교황궁을 빠져나와 성문을 나서면 아비뇽의 또 다른 랜드마크, 아비뇽 다리가 론 강 위에 놓여져 있다. 아비뇽 다리라 불리는 ‘성 베네제 다리’는 1177년 성 베네제와 제자들이 론 강을 가로지르기 위해 건설했는데, 이후 강의 범람으로 유실을 거듭하다 반쯤 잘려진 4개의 아치와 중앙의 기도처만 남은 지금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고 있다. 원래 총연장 90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하니, 교황이 지배하던 아비뇽의 영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람들은 끊어진 다리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데, 다리 위에 오르면 잔잔한 론 강을 중심으로 좌우의 시가지 풍경과 강변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행렬이 한눈에 펼쳐진다. 다리 내부에는 성 베네제 다리와 관련한 역사는 물론 유럽에서는 유명한 동요가 된 ‘아비뇽 다리 위에서’에 관한 자료와 음원 등을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1185년 이 다리가 완공됐을 무렵에는 모두 스물 두 개의 아치가 이어진 멋스러운 자태를 뽐냈지만 지금은 겨우 네 개만 남아 있다. 원래 론 강을 지나는 배들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다리 난간의 높이는 여느 옛 다리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흔적이 역력해, 다리는 온 몸으로 1000년의 시간을 증언해 주고 있다.다리에서 내려와 다시 성 안으로 들어서면 교황궁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좁은 골목을 오가며 아비뇽 구시가지를 돌아보게 된다. 중세에 지어진 건물에서부터 17세기 것에 이르기까지 묵직한 시간의 흔적들이 여행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리에 내걸린 기념품들의 종류도 다르다. 라벤더 꽃송이와 줄기를 통째로 말린 향 제품에서부터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다양한 아로마 제품들 덕에 거리는 은은한 향으로 넘쳐난다. 파스텔과 원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수공 도예품과 식기류 등을 파는 가게와 더불어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내건 갤러리가 구시가의 분위기와 썩 잘 어울린다. 원색의 차양을 늘어뜨린 구시가 거리의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이 여유의 시간에 한몫 더한다.프랑스 혹은 유럽의 어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프로방스의 점심 식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론 강을 따라 풍성하게 거둬들인 달디 단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아비뇽에는 코트 뒤 론 지역에서 만든 양질의 포도주가 넘쳐난다.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포도나무가 전해진 뒤, 1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포도밭이 일궈지면서 코트 뒤 론 와인의 명성은 시작됐다. 아비뇽은 그 오랜 역사와 화려했던 ‘왕년’ 덕분에 프로방스에서도 손꼽히는 미식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여기에 와인이 그 빛을 더해, 사람들은 아비뇽을 두고 “코트 뒤 론 와인의 수도”라고 칭송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매년 포도 수확철이 되면 인근 샤토(‘성’을 뜻하면서 동시에 와인 제조 가문 혹은 와이너리를 지칭하는)의 주인들은 첫 수확한 포도를 들고 아비뇽 교황궁으로 모여드는 축제를 연다. 운 좋게도 아비뇽을 찾았을 때가 바로 이 축제 첫 날이어서 축제의 행렬에 함께 섞여 볼 수 있었는데, 각 가문의 문장이 수놓인 깃발을 앞세운 샤토의 일원들이 줄지어 구시가를 지나 교황궁으로 걸어들어 간다. 이들은 하나같이 가문을 상징하는 색과 무늬로 한껏 멋을 낸 중세풍의 의상을 입고 있다. 누가 얼마나 더 멋진 의상을 차려입었는지 관광객들의 카메라가 바쁘기만 하다. 축제의 흥을 돋우기 위해 우리식으로 굳이 말하자면 ‘포도 아가씨’라 해도 좋을 아비뇽의 젊은 여인들이 행렬과 나란히 걸어가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사탕이며 작은 기념품들을 나눠준다. 이들은 이제 교황궁 안으로 들어가 저마다 들고 온 포도를 성당 제단에 놓고 주교의 집전 하에 포도 풍작을 감사하고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도록 신의 축복을 받는 의식을 엄숙히 거행한다. 비록 아비뇽 교황궁의 영화는 이제 겉치레로만 남았지만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화려한 빛과 향의 와인만큼은 여전히 아비뇽과 프로방스를 풍성한 멋으로 채우고 있다.글·사진 남기환 비틀맵트래블 편집장여행정보1. 아비뇽 가는 법 : 에어프랑스는 인천~파리 간 직항편을 운항한다. 다양한 요금 프로모션을 하고 있어 잘 살펴보면 괜찮은 가격에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홈페이지 주소는www.airfrance.co.kr다. [항공-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아비뇽 공항까지 매일 4회의 국내선을 이용한다(55분 소요). 테제베TGV-파리 리옹역에서 아비뇽 테제베역까지 매일 13번의 기차편이 오간다(2시간40분 소요)]2. 아비뇽 여행 정보 얻는 곳 : 프랑스정부관광성 서울사무소 http://kr.franceguide.com아비뇽관광청 www.avignon-tourisme.com [아비뇽을 비롯한 프로방스 여행 문의 www.discover-southoffrance 혹은 www.provenceguide.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