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경 미래저축은행 대표의 혁신경영 전략

실 한때 사업을 포기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금융회사는 문을 닫는 순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기 때문에 제 명예에도 큰 문제가 생기겠더군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전력투구했습니다.”제주도 토종 저축은행에서 출발해 서울로 진출, 일수(日收) 대출 시장을 평정한 미래저축은행 김찬경 대표의 성공 뒤에는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김 대표는 산업기계 제조업, 광산업, 건설업 등을 통해 재산을 모은 자수성가형 사업가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땅을 산 뒤 건설업체와 함께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 지주공동개발 등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 반열에 올랐다. 그는 1999년 12월 부실해진 미래저축은행의 지분을 인수하며 금융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회사를 인수한 것은 다소 낭만적 동기 때문이었다.“제주도에 기반을 둔 회사라서 좋은 공기를 호흡하며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갖고 있었죠. 특정 지역에서 영업을 하기 때문에 경쟁도 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런 기대를 했는데 막상 회사에 와보니 생각보다 훨씬 부실 대출이 많았습니다. 정말 ‘내가 속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영을 포기하려 했습니다.”그러나 쉽게 그만둘 수는 없었다.“사실 작은 제조업체는 부도가 나도 신문에 1단 기사로도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융은 완전히 다르더군요. 영업을 포기하는 순간 바로 금융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을 닫았다가는 고향에도 얼굴을 들고 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당시에 갖고 있던 3개 회사를 모두 팔아치우고 미래저축은행에 ‘올인’하기로 결심했습니다.”이후 그는 증자에 참여했고 충남 예산저축은행, 서울 삼환저축은행 인수 자금을 대는 등 미래저축은행의 성장을 위해 자본을 집중 투자했다. 총투자 자금은 모두 250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자본 투입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사람과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턴 어라운드’는 불가능하다.“처음 회사에 왔는데 직원들이 자꾸 ‘금융기관’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기관’은 정부가 돈을 대줘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정부에서 돈을 받아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못 벌면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옛날 은행이야 정부 기관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객들이 알아서 찾아왔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훈을 ‘생각을 바꾸자’로 정했습니다. 금융기관이란 말도 쓰지 못하게 하고 금융회사란 말을 쓰게 했습니다.당시 대부분 직원들이 회사를 잘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경영과 관련한 내용을 모두 공개했습니다. 현재 우리 회사 상황이 이렇고 앞으로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내용을 알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했습니다. 자율권을 갖고 참여하는 만큼 책임도 스스로 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참여를 통해 이익을 내면 특별 상여금 형태로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습니다. 실제 흑자로 돌아선 후부터는 꾸준히 상여금을 주고 있습니다.”김 대표는 또 직원들의 의식 변화를 위해 끝없는 교육을 실시했다.“저에게 경영철학이 있다면 교육입니다. 금융업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고객이 맡긴 자산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틀림없이 사고가 생깁니다. 경영이야 오너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은행 자산을 함부로 다루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이런 점을 철저하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육을 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제대로 교육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사고 한 건의 피해 규모는 10년간 들어갈 교육비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교육비는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회사는 틈만 나면 사원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경영 정보 공개, 직원 참여 유도, 교육 등을 통해 강한 조직을 만들면서 김 대표는 새로운 틈새시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제주도만이 가진 지역적 특성은 어려움을 가중시켰다.“저축은행만의 특화된 상품을 개발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자본도 딸리고 브랜드 파워도 약한데 은행과 비슷한 업무로 경쟁하면 살아남기 힘들죠. 그런데 문제는 제주도 시장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제조업체라고는 한라사료와 한라산소주 등 두세 곳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영세한 건설업체와 소방 설비 등 하청업체가 일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숙박업소, 상가, 여행사 등이 전부입니다. 또 금융회사 대부분이 제주도에서 영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축은행의 살 길은 막막했죠.”하지만 블루오션을 만든 다른 혁신가들과 마찬가지로 김 대표도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척박한 제주도의 영업환경은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생존을 위해서는 특화된 시장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게 일수 대출입니다. 제주도는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지역이 고립돼 있기 때문에 두세 사람만 거치면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자녀가 서울에서 돈을 벌었는지 여부를 모두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용도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소상공인들에게 급전을 대출해 주는 일수 사업을 하면 리스크를 낮추면서도 고객에게는 낮은 금리를 제시해 회사와 고객 모두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일수 대출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금을 대출하고 매일 원금과 이자를 조금씩 갚는 서민 금융의 일종이다. 급전을 대출하는 만큼 리스크가 매우 높아 제도권 금융 업체는 이 시장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김 대표는 철저한 신용관리만 이뤄지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사실 초기에는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20억 원 이상 돈을 떼이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실패를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담보나 신용을 평가하는 노하우가 생겨났습니다. 보통 담보도 은행이 1순위로 설정하고 난 후 2순위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담보의 가치를 평가하는 노하우도 쌓였습니다. 특히 음식 숙박업 협회가 추천해 준 점포에는 싼 이자로 대출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수 대출 규모가 증가, 대출액이 1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이를 자축하기 위해 돈을 맡긴 고객은 물론이고 돈을 빌려간 고객까지 총 300명을 초청했는데, 1000명이 운집해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지역 언론이 돈 빌려간 사람에게도 은행이 밥을 산다고 보도해 이슈가 되기도 했어요.”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미래저축은행은 보통 연 60% 이상인 일수 대출 금리를 최저 15%, 평균 25% 정도로 낮게 받으면서 3개월 이상 연체율은 3% 대(시중은행의 경우 평균 1~2%)를 유지하는 등 리스크도 잘 관리했다. 특히 제주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울에도 진출해 서울 일수 시장의 70% 이상을 휩쓰는 성과도 올렸다. 이를 통해 1조 원 대의 총자산에 10개의 영업점을 갖춘 선도 저축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대표는 영업사원들이 분투한 결과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영업사원들은 주로 식당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을 만나는데, 가게 주방에 그릇이 쌓여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접시를 닦아줬습니다. 배달이 밀리면 직접 배달도 해줬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고객들이 영업사원을 신뢰하게 됐습니다. 또 신용 관리도 철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대출금 상환이 늦어지면 영업사원이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저축은행업의 발전을 위해 더 체계적인 검증과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사실 저축은행의 예금 금리가 비교적 높고 5000만 원까지 예금이 보호된다는 점 때문에 많은 고객들이 저축은행의 신용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돈을 맡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저축은행 사고가 발생합니다. 사회적으로 저축은행에 대한 평가가 잘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저축은행 오너가 벤처 기업가인 경우가 있는데 벤처 기업가는 기술로 승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오너의 저축은행업 진출에 대해서는 더 투명한 검증 절차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