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의 첼리스트 정명화
기 가운데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첼로. 올해로 첼로와 호흡한 지 어언 50년이 되는 ‘첼로의 거장’ 정명화는 자신의 목소리를 첼로로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두 동생인 정경화 정명훈과 함께 하는 ‘정트리오’로도 유명한 그녀는 왕성한 활동으로 인생 지형도를 넓혀가고 있다.정명화를 만나기 위해 구기동 자택을 찾은것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순이었다. 벨을 누르자 고운 옷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직접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더운데 고생 많았다.”고 던지는 인사말에서 다정다감함과 원숙미를 느낄 수 있었다.“한 달간 뉴욕으로 가족 휴가를 다녀왔어요. 그래서 지금 몸과 마음이 원기 충전된 상태입니다. 1년에 여름과 겨울 각각 한달씩 뉴욕으로 휴가를 떠나곤 합니다. 지금은 9월에 예정된 첼로 리사이틀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 50년 음악 인생을 성원해 준 음악 팬들을 찾아가는 뜻 깊은 시간입니다. 또 유니세프와 함께 하는 콘서트이기 때문에 세계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의미도 있지요.”이번 리사이틀은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질 유니세프 자선음악회 이외에도 춘천 원주 울산 수원 등 5개 도시 투어 공연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있다.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헨델 ‘유디스 마카바이오스’ 중 ‘보라 용사 돌아오다’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중 제 1변주곡, 로카텔리 첼로 소나타 D장조, 힌데미트 첼로 소나타 등이 연주된다. 피아노 반주는 정명화의 오랜 음악 친구인 피아니스트 김정자가 맡을 예정이다.“연주회를 준비할 때 연주곡을 선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할 파트너를 택하는 일이죠. 피아니스트 김정자는 제 오랜 음악 친구예요. 그녀는 제 음악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코치해 주며 때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기도 하죠. 외국의 경우 유명한 연주가들은 나이가 들어도 늘 음악 코치를 옆에 두곤 해요. 자만하지 않는 거죠. 꾸준히 성장하고자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는 겁니다. 저도 늘 그런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합니다.”‘기교적인 안정감과 개성 있는 음색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녀는 이미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우뚝 서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3~4시간을 연습에 할애할 정도의 노력파다. 그녀가 첼로의 활을 잡은 지 무려 반세기나 흘렀건만 아직도 첼로를 보면 마음이 떨린다고. 어머니가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사준 게 첼로와의 첫 인연이었다.“어렸을 때부터 노래하기를 즐겼고 재능도 뛰어나 성악가가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첼로를 잡자마자 노래 이상으로 첼로에 푹 빠져 밤낮으로 연습했어요. 아직도 세상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와 가장 흡사한 소리를 내는 첼로는 저와 가장 잘 맞는 악기라고 확신해요. 중후한 남성의 소리를 내다가도 때로는 여성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제이기 때문이죠.”자신과 잘 맞는 악기를 발견했던 정명화는 피나는 노력 끝에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국내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1961년 뉴욕의 줄리아드 음대에서 레너드 로즈를, 1965년부터 남가주대(USC)의 마스터 클래스 과정에서 3년간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갔다.그러던 중 1967년 샌프란시스코 콩쿠르에서 1등에 입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69년 주빈 메타 지휘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으며 루돌프 캠페, 안달 도라티, 줄리니 등 동시대 최고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면서 정상의 첼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71년 동생 명훈을 반주자로 동반하고 참여한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하면서 정명화의 이름 석자는 유럽 무대에서 각인된다. 또 유엔 창설 50주년 기념음악회, 키싱거 독일 총리를 위한 백악관 환영음악회 등에 특별 초청돼 연주하는 등 주가를 잔뜩 올렸다. 그녀는 1984년 이탈리아 시칠리 교향악단의 ‘올해 최고의 연주자’로 선정됐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액셀런스 2000상’ 등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첼리스트 대열에 당당히 들어섰다.“돌이켜보면 꿈같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남가주대에서 피아티고르스키 선생님에게 사사하던 때지요. 인간적으로 서로 통하는 걸 느꼈어요. 선생님이 내 음악성을 인정해 주시고 본인의 연주활동도 줄이면서까지 아낌없이 지도해 주신 덕분에 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죠. 하지만 견딜 수 없이 힘든 시기도 찾아오더군요. 30대 중반쯤 실력에 진전이 없자 좌절하고 첼로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가족의 독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 최대의 슬럼프였죠. 그 시기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길게 느껴질 정도였어요.”그녀에게 가족의 의미는 남다르다. 세계 최고의 앙상블 ‘정트리오’의 여동생 경화, 남동생 명훈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기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녀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는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다. ‘여자는 결혼하면 연주자로서의 생활이 끝’이라는 음악계의 징크스를 깨고 뉴욕 유학 시절 지금의 남편을 만나 꾸민 가정도 그녀에겐 든든한 언덕이다.“밸런스를 잘 조절한다면 일과 가정을 함께 잘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속에 늘 중요 순위를 매겨 그때그때 다르게 일과 가정의 비중을 조정해 나갔어요. 예를 들어 연주회가 있는 달이면 일을 50%, 그 나머지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쓰는 식이었죠. 요즘은 두 딸 중 큰 애가 시집을 갔기 때문에 좀 수월해졌어요.(웃음) 주중 아침 시간은 첼로 연습 시간으로 늘 비워 놔요. 그래서 점심 약속은 만들지 않는 편이죠. 오후엔 학교에 나가 강의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시간씩 집 앞에 있는 북한산에 올라가요. 늘 앉아서 첼로를 하기 때문에 다리가 약한 편인데 등산을 하니 다리 운동에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첼로의 깊은 저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만의 특별한 재능이 이제 후학 양성을 위해 빛을 발하고 있다. 정명화는 서울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푹 빠져 있다. “대개 정상급 연주가들은 교육과 연주 활동을 병행하고 있어요. 전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늦게 시작하게 됐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얻는 게 더 많습니다. 또한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세계무대에서 훌륭한 기량을 보여줄 때의 기쁨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대단해요. 한국엔 재주 있는 학생들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주입식 교육으로 그 아이들의 개성이 십분 발휘되지 못할 때 너무 안타깝죠. 거장은 재능과 교육 그리고 선생님의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탄생되기 때문입니다.”그녀의 또 다른 관심사는 사회봉사활동이다. “젊은 음악가들을 데리고 한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직접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요. 음악가로서 힘이 다할 때까지 제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