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보고는 하층 신분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에 건너가 장교로 활약했으며, 귀국해서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국제 교역을 주도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나중에는 중앙의 권력 투쟁에까지 개입하게 된다. 종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수공업장이나 선박, 수레 등의 운송 수단을 갖춘 대상인은 진골 출신 같은 특권층이거나 평민 가운데 극히 소수의 전업 상인들이었다. 장보고는 이들보다 신분이 낮았지만 활동 영역은 대내외 교역 분야를 망라했고, 중앙 정계에 충격을 줄 정도의 정치·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장보고의 위치와 활약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외적이거나 느닷없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8세기 이후 통일신라의 상업 및 대외 교역의 발전, 그리고 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여기에 장보고의 개인적 능력과 주변 인물들의 조력이 더해져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다. 장보고가 활동하던 때는 통일신라 말기로서 기성 질서가 해체돼 가는 시기였다. 신라의 전통적인 정치 체제에서 비롯된 갈등은 혜공왕대(765~780) 진골 귀족들의 대대적 반란으로 폭발했다. 혜공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간 숨죽이고 있던 진골 귀족들의 왕권에 대한 반격이 표면화됐다. 일련의 반란은 모두 진압됐지만 그 와중에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이 실권을 장악했다. 780년 이찬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자 김양상과 김경신이 주도해 이를 평정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혜공왕이 피살돼 김양상이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무열왕계인 김주원과 상대등 김경신이 대립했는데, 결국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그런데 원성왕계의 하대 왕실은 그 전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사병을 거느린 귀족 간의 합의와 세력 균형 위에서 정권을 유지하는 귀족 연립정권 체제가 성립됐다. 각 귀족들은 자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사병과 함께 문객(門客) 양성에 주력해 광범한 사적 주종 관계를 형성했다. 문객은 혈연과 관계없이 유력자의 문하에 의탁해 온 사람을 말한다. 당시 경제적으로도 장보고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신라는 통일 이후 확대된 경제 기반을 토대로 국내의 산업이 안정되고 왕경(王京)에 시장이 증설되는 등 유통경제도 발전했다. 그리고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종래 제한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외제품이 본격적으로 수입됐다. 고급 섬유, 향료, 각종 장식용품, 책 등이 그것이다. 금 은 인삼 종이 같은 신라 제품도 당, 일본 등지로 수출됐다.대외 교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항해술, 운송 수단, 자위력이 요구됐다. 여기에 더해 보다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왕실 귀족 사찰 등 고급 수요층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 개발과 공급이 필요했다. 신라는 물론 당, 일본 사회의 외제품 선호와 사치풍조는 당시 공통적인 사회현상이었으므로, 이에 부응하기 위해 적절한 상품을 생산, 공급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장보고 집단의 교역 활동을 검토하면서 청자(靑磁)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청자는 고급 용기였기 때문에 세계 각지로도 수출됐다. 신라, 일본에 대해서도 상품성이 있는 제품이었다. 유명한 고려의 비색(翡色) 청자도 신라 말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중국산 청자의 영향과 이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고려 도공의 예술 정신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처럼 국제적으로 높은 수익성을 가진 신상품에 대해 장보고 집단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초기에는 당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생산된 청자를 구입해 신라나 일본에 전매하는 중계무역의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장보고 집단이 신라에서 초기 청자를 생산해 신라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유통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월주요계 청자는 신라 주민들의 사치 욕구에 부응해 새로운 교역 상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당시 월주요계 청자가 장보고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의 하나였을 가능성은 크지만, 신라 영역에서 장보고의 통제 하에 초기 청자를 자체 제작했다고 단언하기에는 아직 근거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장보고의 성장 과정과 활동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실 난센스에 가깝다. 1000년도 훨씬 넘는 오래 전의 인물에게서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 체제와 시대적 조건의 차이와 더불어 현재와 공통되는 면도 있으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장보고는 권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상업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기존 진골 귀족들의 상업 활동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그가 원래 해안 혹은 섬 지방의 평민 이하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타고난 신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당나라로 진출하고, 귀국해서는 정계의 유력자와 연합해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리고 당 조정의 군비 삭감 정책 때문에 일종의 정리 해고를 당한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출로를 모색했다. 청자라는 새로운 상품의 등장 등 교역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 것도 이러한 능동적 면모를 보여준다.재당 신라인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일본 내에도 자기 세력을 심어 교역 기반을 확대한 것도 주목된다. 흔히 장보고의 대인적 풍모를 얘기할 때 정년과의 우정과 변함없는 믿음을 거론하는데, 이렇게 신의에 기초한 인간관계가 그의 세력을 확대하는데 기여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장보고의 뛰어난 자질과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846년 정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결국 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힘만으로 신라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남쪽 끝 청해진에서 일군 지방세력은 왕경 진골 귀족 중심의 골품사회에 일격을 가했으며, 동아시아 삼국에 걸친 대외교역의 성과는 고려 왕조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