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富脈’지도… 드라마틱한 부자론

리 역사에 등장한 부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지역 특산물과 도자기 등 수공업품을 가지고 멀리 바다를 건너 교역했던 원격지 무역인들이 어떻게 해상 활동을 하고 해로를 개척할 수 있었을까. 이상은 산업자본이 형성되기 이전의 부의 원천과 부자에 대한 궁금한 사항들이다.물론 산업자본이 형성된 다음에도 궁금증은 끝이 없다. 개항기 외국인 투자가 늘고 있던 가운데서 우리나라의 부자와 상인들은 어떻게 부를 축적했으며, 식민지 시절 민족자본은 제국주의 자본과 경쟁하며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광복 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기업인 적산을 미 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키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 자본을 잘 활용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우리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5대 재벌과 30대 기업은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세계화를 추진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이다. 이처럼 한국 경제사는 봉건시대와 식민자본시대, 근대자본시대를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자본주의가 먼저 성립된 서양이나 우리나라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상업자본 축적은 일반적으로 상업의 발달이나 원격지 해상 무역을 통해 이뤄졌다. 왕조 하에서 통일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를 운영해 온 우리나라에서는 향시 육의전 약령시 객주 여각 부보상 거간 주막 등의 상업과 고려시대의 송 거란 여진 몽골 왜 등과의 교역 및 조선시대의 왜관개시 중강개시 책문후시 북관개시 등의 국제 교역시장을 통해 상업자본을 축적했다. 여기서 신라 말기의 해상왕 장보고와 조선후기의 무역 거상 임상옥 등이 등장했다. 조선 후기와 한말 화폐 경제가 성립되면서 상인 자본의 형성이 본격화되고 외국인의 대부 자본이 유입되면서 순수 민족자본 기업과 외국 자본 기업이 공존하는 시기를 거친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 자본 또는 민족자본이라 일컫는 우리 자본이 일본의 제국주의 자본과 힘든 경쟁을 벌였다. 우리나라에 본점을 둔 회사의 자본금 비율에서 볼 수 있듯이 1911년에는 조선인 자본이 18.6%, 일본인 자본이 26.4%, 합동 자본이 55%였으나 점차 일본인 자본이 강해져 1942년에는 조선인 자본이 4.2%, 일본인 자본이 94.4%, 합동 자본이 1.4%로 바뀌었다. 일제 때 회사의 숫자도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 설립 회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1911년 조사에서는 조선인 설립 일반 회사가 44개였고 일본인 회사가 10개였으나 1929년에는 공업회사 수가 조선인 설립 143개, 일본인 설립 301개로 바뀌었다. 회사를 설립하려고 해도 회사령에 의해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각국의 산업자본 형성기를 보면 통상 초기에 방적공업과 철강업 등에 대한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경제 상황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융업이 발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적업이 일고 철도사업과 비료산업 등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고, 호남은행 대구은행 호서은행 등이 설립됐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나 기업을 7년간 일본을 지배한 미 군정이 귀속 재산을 불하했다. 불하된 귀속 기업체는 면방직, 고무공업, 모직-견직-인견, 금속 및 기계공업, 음식료품 순이었다. 이때 불하 신청을 한 사람은 일제 때 관리인, 일제 말 기업가, 지주, 기술자, 미 군정기 기업주 등으로 이후 우리나라의 유산계층과 부자는 상업, 금융업, 광공업, 기타 회사를 운영하는 자본가들로 확대됐다.산업자본 초~후기로 볼 수 있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거상으로는 ‘박가분’을 설립해 화장품을 제조하고 동양맥주의 전신인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운영한 매헌 박승직을 들 수 있다. 또 삼양사를 설립하고 경성방직 등을 운영한 수당 김연수도 대표적 기업인이다. 이후 한국전쟁과 경제개발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업가들로 금성방직의 성곡 김성곤, 그리고 박승직의 장남 연강 박두병, 현 LG전자의 모태인 럭키그룹의 연암 구인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주로 1차 업종인 농업 등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2차 업종인 중화학공업의 기술력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 재벌의 태동이 시작됐는데 제당 제분 방직 화학을 중심으로 럭키금성 쌍용 현대 삼성그룹 외에 삼양사그룹 등이 이때 등장했다. 이러한 기업 집단의 등장은 가계에 뿌리를 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60년대 삼성 삼호 개풍 대한 럭키 동양 극동 한국유리 동림산업 태창방직으로 대표되던 10대 재벌은 많은 변화를 거쳐 21세기에 들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포스코 SK 기아자동차 LG칼텍스정유 S-Oil 현대중공업 LG필립스LCD 등 상위 매출액 10대 기업으로 변했다. 이때 등장한 기업가는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최종건 등을 꼽을 수 있으며, 2세 내지는 3세 경영 체제에 돌입한 대표 기업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 1세대 창업주들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오일쇼크 등을 커지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서서히 갖춰나갔으며 이에 따라 60~70년대 국가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시기에는 엄청난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그 후손들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앞으로 이들 2, 3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세계화를 기초로 정보기술(IT)이나 생명기술(BT) 등에서 얼마만큼 국가와 인류에 공헌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순탄치 않았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이지만 농경사회, 공업화사회, 정보화사회를 거치며 수많은 부자들이 상업이나 공업화, 그리고 지식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거상, 거부, 기업가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한결같이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다가올 미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졌던 선구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의 굴레를 깨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자만이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러한 통찰력을 갖는 데는 자신들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자의 경제사가 늘 드라마틱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블루오션이라는 경영 이론이 주목받고 있는데 가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이와 같은 방법은 장보고 임상옥 김연수 이병철 정주영 등 경제 선각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배어 있다. 개방된 사회, 세계화된 기업들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금 IT와 BT 사회를 주도하기 위한 무한경쟁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도 부는 IT, BT 등 앞선 기술을 어떻게 현실에 도입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선 경제 선각자들처럼 세계를 무대로 진취적인 기상으로 나아갈 때 한국 경제사는 그를 위대한 경제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