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우리의 국채 1300만환은 대한(大韓)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으면 나라는 유지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라.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환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환, 10환, 100환, 1000환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이 말은 1907년 1월29일 대구의 광문회에서 서상돈이 제안한 말이다. 같은 해 2월25일자 황성신문 사설‘단연보국채(斷煙報國債)’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흥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대한광무 11년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이 하늘에서 온 복음을 전하도다. … 두 손을 들어 재배하며 대한제국 만세, 대한제국 동포만세를 소리쳐 선창하고 삼백 번을 춤추며 이 만고의 호소식을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봉헌하노니, 이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 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 제씨의 단연동맹한 호소식이로다. … 20세기 오늘의 세계에 대한민국 명예로운 이름이 전 지구상에 찬란히 빛나리니… 뒷날 대한독립사 제1권 제1장에 대서특필하여 해와 달같이 게재할 것이 이 단연동맹회의 서상돈 등 제씨가 아니겠는가.”서상돈(徐相敦)은 1851년에 태어나 1913년까지 산 사람으로 3만석지기 영남 갑부였다.서상돈은 자수성가한 부자였다. 그는 대구 서씨로 아버지 서철순과 어머니 김아가다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김아가다는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837년 당시 단 두 집뿐었던 대구의 천주교 신자 가족 중 하나인 김후조(요안)의 장녀였다. 서상돈의 선대는 안동에서 오래 살다가 그 후 벼슬을 얻어 서울로 올라가 몇 백년 간 살다가 그의 증조부 서유오가 천주교를 믿으면서 출문당해 강원도에 은신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조부 서치보는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다시 거처를 옮겨 상주 옥산에서 숨어살면서 옹기굴에서 막일꾼으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대에 처가인 대구로 옮겨와 남문 밖 큰 장(현재의 대신동 서문시장) 앞의‘앞밖거리현 계산동(대구시는 그의 고택을 복원해 보존할 계획이라고 함)’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송광길이 쓴‘거부야화’에 따르면 서상돈이 돈을 벌기로 결심한 것은 숙부 서익순이 천주교 신자로 잡혀가 순교하면서였다고 한다. 그는 13세 때 집 가까이에 있는 어느 상가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억척스레 4~5년 일하면서 장사를 배우고 독립에 성공했다. 그는 당시 천주교 신자이면서 부보상의 지역 우두머리였던 도회장 최철학의 은밀한 도움을 받았다고 하며, 그의 상재가 인정돼 마침내 당시 거상이던 김종학의 눈에 들어 수안 김씨 문중에 장가 들게 됐고, 낙동강을 무대로 소금 쌀 면포 지물 포목 등을 거래하며 부를 쌓아갔다.서상돈은 천주교인이라는 신분을 오히려 적극 활용해 사업을 함으로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토지에 투자해 3만석지기 대지주가 됐다. 1902년에는 대구전보국 사장 조중은과 함께 양잠회사를 설립해 칠곡에 뽕나무 2만여 주를 심었다. 또한 토마토 오이 양배추 등 고등소채 재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인 야기(八木)에게 1만환을 주고 지금의 남산동 주교당 일대 땅에 부식원(富植園)이라는 신식 농장을 열기도 할 만큼 신문물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그는 1903년 내장원의 경상도 시찰관이 됐다. 시찰관은 조세 수취 청부업자를 말한다. 갑오경장으로 세제가 개편됐고 공물제가 금납제로 바뀌었다. 이때 지방 기관장의 추천으로 민간 대지주가 시찰관을 맡았다. 당시 경상관찰사 조병호가 서상돈을 추천했다. 그후 서상돈은‘서시찰’로 불렸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증조 때부터 박해를 받으며 떠돌던 불우한 시절을 청산할 수 있었다.1904년 26세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의 대구로 건너온 가와이 아사오란 일본인 잡상인이 쓴‘대구이야기(大邱物語)’란 책에서‘벼락부자가 된 세금 징수 청부업’이란 구절을 찾을 수 있다. “한전(韓錢)을 지방에서 수송하는 데는 막대한 운반비가 들어서 군에서는 세금징수 청부업자가 있었다. 군수 또는 지방의 부자가 청부를 맡고 있었다. 부자가 아니고서는 청부할 수 없는 것이, 예컨대 영천군 일대의 조세를 10만환으로 청부했다면 우선 그 돈을 정부에 대납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납한 후 그 지방으로부터 각각 세금을 징수한다. 15만환을 거두면 5만환을 벌게 된다. 꽤나 장사가 잘 되니 중앙에 대하여 맹렬한 운동을 한다.…”그러나 송광길은‘서시찰’은 세금을 대납하고 세금징수 후 남은 수만금의 이익금도 모두 나라에 헌납하고자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결전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라에서 손이 모자라 시찰관에게 맡기고 이익금을 시찰관에게 넘긴다고 했으나 그 이익금은 나라의 돈이다. 근자에 나라 재정이 곤핍하다는데 어찌 나라 일을 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1904년의 소위 고문정치로 일제가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예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제로 차관을 도입하고 공채를 발행해 진 외채가 1300만환이었다. 서상돈은 개인이나 나라가 빚(부채)을 지면 어떤 과정을 거쳐 예속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 외채를 갚아야 하며, 그 방법으로 백해무익한 담배를 끊음으로써 실천하고자 앞장섰던 선각자였다.박영규의 논문을 보면 “… 대구 서문 밖 수창사에 설치된 대구국채담보회 사무실에는 의연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의연금 영수증은‘대구민의소’명의로 발급되었다”라고 기록돼 있어 이 운동의 실제 추진체는 김광제·서상돈 등이 조직한 대구민의소였음을 알 수 있다.황성신문에 따르면 “서상돈은 서문시장에서 연설할 때 단연하는 대의를 혈심으로 권고하고 군중을 향해 큰 절을 하니 장꾼이 감탄하여 출연하는데 백정 김시복은 10환을 의연하였다”라고 보도했으며 또 다른 일자의 신문에 “… 전시찰 서상돈 1000환, 전군수 정재학 400환을 비롯 전군수 김병순, 전승지 정규옥, 전돈영 정계상, 전참봉 서상민, 전경무사 서상용 등이 각기 100환을 특별 의연하였고, 김병순, 정규옥, 이일우 등은 각기 100환을 출연하여 그 회(의)비를 분담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항래는 논문에서 “이 운동은 일제의 끈질긴 방해로 비록 실패했으나 1919년‘3·1운동’을 발발케 한 한 요인이었으며, 1920년‘물산장려운동’의 효시였고, 가까이는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극복하는 정신적 기초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2007년 2월21일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는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정진석 대주교가 우리나라 두 번째 추기경에 서임돼 온 나라가 축하했지만 1911년에 교황 성 비오가 우리나라에 하나뿐이던 교구를 분리해 충청 이북을 서울교구라 하고 대구교구를 하나 더 증설, 경상도와 전라도를 관할하도록 결정했다.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부임한 안플로니아노 주교는 여건상 전주로 교구본부를 옮길 계획이었는데 서상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생전에 꿈이 있다면 프랑스 부르드 지방의 성모를 모신‘마사벨’굴과 꼭 같은 성모당을 주교당 앞에 짓고 싶습니다. 부디 교구를 옮기지 말아주십시오.”이 말에 감복한 주교는 대구에 대교구를 건설했고 서상돈은 부지로 농장 1만여 평을 희사했다. 서상돈은 그 이전 계산성당 건립에도 거액을 내놓았던 전력이 있어 대구교구 발전의 초석이 됐다. 또 그는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년 봄· 가을에 양곡 수백 석을 내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그의 사랑채에는 항상 수십 명의 식객이 모여들었고 한다.